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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B.C. 18년부터 660년까지 존재했던 한국의 고대 국가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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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는 한국의 고대 국가 중 하나로, 고구려, 신라와 함께 삼국 시대를 구성하였다. 고구려에서 남하한 온조왕이 세운 국가가 기원이다. 초기에 명칭은 십제(十濟)였었고, 이후에는 백제(百濟)로 바꾸었으며, 그리고 성왕 시기에는 남부여(南扶餘)라고 하였다. 백제는 원래 마한의 54소국 중 하나였으나 온조왕 이래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고이왕 시기 백제는 중앙집권을 위해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들여왔으며, 백제는 이에 힘입어 4세기 근초고왕 때 전성기를 맞아 가야를 복속하고 황해도로 진출했으며 고구려평양성에서 전투를 벌여 고구려 국왕 고국원왕을 죽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한강 이북을 상실하고 장수왕의 침략 때는 수도 위례성이 함락되어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고구려에 맞서기 위해 백제는 신라나제 동맹을 체결하였다. 성왕 시기 백제는 국력을 회복하여 수도를 사비성으로 옮기고, 여러 개혁을 단행하고 적극적인 확장 정책으로 한강 유역을 일시적으로 되찾았으나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한강 유역을 잃었다. 이후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하면서 백제는 다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백제는 이후 고구려와 다시 동맹을 맺고 신라와 계속 전쟁을 벌였다.

간략 정보 백제, 수도 ...

659년 나당 동맹이 체결된 뒤 660년 신라 태종무열왕이 당나라 군대와 연합해 백제를 침공했고,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가 함락되면서 백제는 멸망했다. 이후 3년 간 백제 부흥운동이 이어졌으나 백제가 패배하면서 부흥 운동도 막을 내렸다. 백제는 일찍이 한강 유역에 도읍을 두었기에 중국과 바로 교역을 할 수 있었으며 요서탐라 지역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백제의 문화는 삼국의 문화 중 가장 유려하고 미학적 예술성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5]백제 금동대향로[6] 백제의 문화유산은 대한민국 역사학계 및 예술계에서 그 우수성과 미학성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또한 2015년 7월 4일에는 유네스코에서 백제의 옛 수도인 공주시부여군, 그리고 백제 유적이 있는 익산시의 백제 시기 문화유적지를 묶어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지정한 바 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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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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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상 백제는 나라 이름을 몇 차례 바꾸었다. 삼국사기에 처음 나오는 백제의 국호는 십제(十濟)이다. 그러다 온조왕(溫祚王)이 형인 비류(沸流)가 다스리던 백성을 합쳐 더 큰 나라를 만들 때 비류의 백성들이 모두 즐거워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는 설명이 있다. 한편 중국 측의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동이전(東夷傳)에서는 한자가 조금 다른 백제(伯濟)가 마한에 속했다고 기록한다. 또한 『수서(隋書)』 백제전에는 처음에 백여 호(戶)가 바다를 건너[百家濟海] 남하하여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백제라 하였다고 씌어 있다. 백제의 국호에 대한 삼국사기와 수서의 설명 가운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아직 가려내기 어렵다.[8]

한편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왕 16년, 538년에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며,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꿨다. 다만 남부여라는 국호가 멸망 때까지 사용되었는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왜냐하면 1995년에 발견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에서 “백제창왕(百濟昌王)”이라는 표현이 보이기 때문이다.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로 했음에도 바로 다음 왕인 창왕, 즉 위덕왕대에 와서 다시 백제(百濟)라고 표현한 것은 그만큼 성왕의 의도가 위덕왕대에 부정되고 있었던 상황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9]

또한 백제의 별칭으로는 응, 응준, 응유가 있으며,[10]

≪삼국사기≫ 본기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溫祚)이니, 그의 아버지는 추모왕(雛牟王)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리를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그곳 왕에게 아들이 없고 다만 딸이 세 명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안 되어 부여주(扶餘州)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沸流)이고 다음은 온조(溫祚)다.[11] 그들은 후에 태자(太子)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여 명 신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니, 백성들도 이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이 있는가 찾아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기를 바라니 열 명의 신하들은 간하기를, ‘오직 이 하남(河南)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며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며, 남쪽으로 비옥한 못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가로놓여 있어서 천험(天險)과 지리(地利)가 좀처럼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雛忽)에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하여 열 명의 신하를 보필(輔弼)로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하였다.[12]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편안하게 살 수가 없었다. 위례성에 와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편안히 살고 있으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며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 백성들이 올 때에 기뻐하였다고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그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해(解)로써 성씨를 삼았다. 그 뒤 성왕(聖王) 때에 이르러 도읍을 사비로 옮기니 지금의 부여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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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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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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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최대 지배권역

삼국사기 등에 의하면, 백제는 기원전 18년 온조왕에 의해 건국되었다. 온조왕은 고구려주몽의 아들로 알려져 있으며, 남하하여 하남 위례성을 수도로 삼아 백제를 건국하였다. 이후 백제는 한강 유역에서 기반을 다져나가면서 주변 세력과의 대립과 교류 등을 통해 점차 성장하였다. 4세기 근초고왕 시기에 전성기를 맞아 중국의 동진과 활발한 교류를 맺었다. 또 마한 전 지역을 직간접적으로 복속시키고, 북상하여 고구려 영토인 현 황해도 일대까지 권역을 확장하였다.

하지만 5세기 후반,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인해 한성은 475년 함락되었고, 개로왕이 전사하면서 백제는 수도를 웅진(충청남도 공주)으로 옮기게 되었다.

웅진기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장수왕에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결국 개로왕이 사망하였다. 결국 백제는 한강 유역의 수도 한성을 빼앗기고 금강변의 웅진으로 수도(475년)를 옮기면서 영토가 크게 위축되었다. 또한 중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간 내분이 발생하였으며, 문주왕 때는 해구와 같은 무인 실권자가 등장하여 백제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5세기 후반 동성왕 때부터는 다시 사회가 안정되면서 왕권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은 혼인을 통해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에 투쟁하였고, 무령왕양직공도에 의하면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였다. 한강유역의 상실로 인한 인적·물적 기반의 약화를 영산강 유역을 확보하여 만회하였으며[13], 기문지역을 확보하여 백제의 영향력으로부터 이탈을 꾀하면서 독자노선을 추구하던 가야를 견제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백제는 정국운영에 안정을 가져올 수 있었다.

사비기

성왕은 금강과 함께 넓은 평야지대를 갖춘 부여 지역의 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기고(538년),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 대륙의 남조와 교류하였다. 이후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수복하였다. 하지만 점령하였던 한강 하류지역을, 상류지역을 차지하기로 했던 신라가 곧 공격하면서 빼았았고, 성왕은 결국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무왕은 신라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한편 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인 고구려와 수나라가 각축전을 벌일 때, 어느 한쪽에 가담하기보다는 양쪽의 대결을 이용한 기회주의를 펼쳤다. 이와 더불어 절대 왕권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대규모 역사(役事)를 단행하였다. 630년 사비성을 중수했으며 고향인 금마저(전라북도 익산)를 중시해 별도(別都)로 경영하고, 장차 천도(遷都)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또한 정실 왕후 사택씨(沙宅氏) 세력의 보시로 막대한 경비와 시간을 들여 익산에 백제 최대 규모의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했다. 미륵사와 관련된 일화로 고려 시대의 승려 일연삼국유사에서는 서동 출신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있다. 기존에는 삼국유사를 기반으로 미륵사 창건이 선화공주가 중심이 됐다는 설이 지배적이었으나, 2009년 1월 14일에 미륵사지 서탑 해체 중 발견된 금동사리함 명문에는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아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의 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라고 적혀있다.[14] 결과적으로 무왕은 실리적인 정치외교와 익산 천도를 통해 귀족 세력의 재편성을 꾀하였고, 이는 관산성 전투 패배 이후 동요된 백제 왕권을 회복하여 이후 의자왕 대에 절대 왕권을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다.

멸망

642년(의자왕 2)에 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하며 신라를 압박했다.[15] 신라는 고구려의 힘을 빌리려 하였으나 실패하고[16] 에 연합을 요청한다.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당 태종의 신임을 얻고, 나·당 간의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660년 당 고종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책총관(神丘道行策摠管)으로 삼고 유백영(劉伯英), 풍사귀(馮士貴) 등과 함께 1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정벌을 명령하였다.[17] 태종무열왕김유신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고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당군과 합세하게 하였다.[17] 당나라는 수로를 통해 백제의 백강(白江)으로 진격하였고, 신라의 5만 정예군은 육로를 통해 백제의 탄현(炭峴)[주 1]으로 진격하였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 방면으로 진군하자, 의자왕은 신료들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좌평 의직(義直)은 당군과 먼저 결전할 것을 주장했고, 달솔 상영(常永)은 신라 정예군을 우선 막을 것을 주장하여 분열이 일어났다.[15] 또한, 귀양 중이던 흥수(興首)는 평야에서 접전하면 불리하므로 백강과 탄현을 선점해 연합군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자고 건의한 반면, 대신들은 연합군이 각각 백강과 탄현을 오른 뒤에 공격하는 것이 이롭다고 주장했다.[15]

이렇게 의견이 나뉘어 싸우는 동안 연합군은 요충지인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을 넘어 왔다. 신라군의 진군로는 경주,보은,이천에서 진군하다 회군하여 다시 이천,보은,굴산성(이성산성),영동,옥천,탄현,테미고개,정림동고개,갑천,흑석동산성 석고개,두계천,양정고개,연산시장3거리(황산벌),연산천으로 진군하였다. 이에 의자왕은 급히 계백을 황산벌로 보내 신라군을 막게 하였다.

계백은 죽음을 각오한 군사 5천 명을 뽑아 출전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한 나라의 사람으로서 당과 신라의 대규모 병력을 맞게 되었으니, 국가의 존망(存亡)을 알 수 없다. 내 처와 자식들이 잡혀 노비(奴婢)가 될까 염려된다.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죽어서 흔쾌한 편이 나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가족을 모두 살해하였다.[18] 계백의 전설은 후기에 신라의 의해 만들어졌다는 견해도 있다. 즉 계백이 출전 전에 가족부터 몰살했다는 것은 개연성이 부족하다. 계백같은 충신이 있었어도 의자왕의 무능력함을 부각시켜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의 멸망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란 견해다.

의자왕은 즉위 초기부터 신라를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여러 성을 빼앗는 등 활발한 대외활동을 통해 왕권을 더욱 강화시켰다. 하지만 이는 신라가 당나라와 더욱 연결되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계백의 결사항전에도 불구하고 660년에 사비성이 함락되며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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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관제

관서는 내관 12부와 외관 10부로 나뉘어 총 22부가 있었다. 내관에는 전내부(前內部)·곡부(穀部)·육부(肉部)·내경부(內𢈴部)[주 2]·외경부(外𢈴部)[주 3]·마부(馬部)·도부(刀部)·공덕부(功德部)·약부(藥部)·목부(木部)·법부(法部)·후궁부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왕실·궁내에 속하는 관서였다.

외관에는 사군부(司軍部)·사도부(司徒部)·사공부(司空部)·사관부(司冠部)·점구부(點口部)·외사부(外舍部)·조부(綢部)·일관부(日官部)·시부(市部)가 있었다. 이들은 일반 정무를 담당하였다. 종래의 족장 선출의 유풍이 남아 각 관서의 장은 3년마다 교체되었다.

행정 구역

지방 행정은 원래의 부족 세력과는 전혀 무관한 방위로 표시하였다. 성왕 때 수도를 5부[주 4]로 구분하고 전국을 5방[주 5]으로 나누었다. 방 밑에는 10군을 두었으며, 방에는 장관격인 방령과 차관격인 방좌를 두어 통솔케 하고, 군마다 3인의 장이 있어 700~1,200명의 사졸을 거느리게 하여 국왕의 호족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밖에 전국 22개의 행정구역에는 왕자·왕족을 살게 했으며, 이를 ‘담로’라 하였다.

경제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이후 직조술 ·염색술 등 수공업이 발달하였고, 무기·불상 등 금속공업도 가능해졌다. 왕토사상이 원칙이고 토지의 측량방법은 두락제를 썼으며 조세는 조를 쌀로, 세는 포목, 비단 실과 쌀을 내었고, 재앙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중국 남부와 교역이 성행하여 왜에 말 ·누에 ·직조법 ·양조법 등의 생산품과 그 기술이 전파되었다. 무역항으로는 영암성이 번성하였다.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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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직공도〉에 나오는 백제 사신의 모습[19]

백제의 언어와 풍속은 고구려, 신라와 큰 차이가 없었다. 활쏘기를 좋아하는 점에서 고구려와, 형법의 적용이 엄격한 점에서 신라와 유사하였다. 반역자나 전쟁터에서 퇴각한 군사 및 살인범은 참수했고, 도둑은 귀양을 보냄과 동시에 2배를 물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횡령을 했을 때는 3배를 배상하고 종신형에 처하였다.

지배층은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의 고전과 역사책을 즐겨 읽었고, 한문과 관청의 세무에도 밝았다. 음주, 바둑, 장기는 삼국의 지배층이 즐기던 오락이었다.

문화

요약
관점

백제는 천문에 있어 고구려와 신라보다 뛰어났다.[20] 평양이나 경주보다 부여에서는 더 정밀한 일남중 고도를 측정할 수 있었기에 천문지식에 있어서 고구려와 신라가 백제에 미치지 못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20]

한학

오경박사·의박사·역박사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한학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 472년 북위에 보낸 국서가 《위서》에 실려 있다. 또한 541년 양나라 사신 육허가 와서 〈예론〉을 강의하였으며, 근초고왕 때의 아직기와 근구수왕 때에 한학을 전하였다. 백제의 첫 역사서는 375년에 고흥이 편찬한 《서기》이다. 주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응유 사람들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중시하며, 고전이나 역사서를 좋아한다. 그중에 준수한 자는 꽤 능숙하게 문장을 짓고 음양오행을 이해하고 있다.'

종교

주서》는 백제에 대해 “절과 탑이 매우 많다.”고 기록하고 있다.[21] 불교가 융성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22] 불교는 384년 서역의 승려인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에서 전래된 것이 기록상 최초로 나타난다. 침류왕은 마라난타를 궁궐에 머물게 하면서[23] 이듬해에는 사원을 지어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했다.[24] 응유의 불교는 이 때부터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전래 초기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 숭상·장려되었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찰을 건립한 경우도 많았다. 577년(위덕왕)에 착공해[25] 634년(무왕 35)에 완성된 왕흥사는 호국사찰이다. 599년(법왕 1)에는 생물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국왕의 명이 있었으며, 민간에서 기르는 매를 놓아주며, 어로와 사냥도구들을 강제로 불태운 적도 있었다.[26] 백제의 불교는 계율의 연구가 활발했으며 겸익이 대표적인 계율종 승려였다. 한편 백제 금동대향로로 미루어 보아 도가와 신선 사상이 발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산경문전이나 사택지적비에도 도교사상의 영향이 발견된다. 또한 낙랑·대방의 중국인과 접하면서 일찍부터 한문과 유교를 접했다. 그리하여 4세기 중엽 역사서인 〈서기〉가 편찬되기도 했고, 오경박사를 두면서 유교를 장려했다.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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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정면

불교 미술이 발달하였다. 7세기 신라가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설할 때 아비지가 초빙된 사실[27][28] 동성왕 때의 임류각, 의자왕 때의 태자궁·망해정이 건축된 기록은 있으나 고려시대에 파괴되었으며,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 등만 남아 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우아한 곡선으로 안정감을 주며 백제의 석탑 중에 가장 우수하다. 조각품으로는 석불과 금동불, 불상 등이 있다. 말기에는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전축분이 많이 남아있다. 무령왕릉에서는 사대주의를 반영하는 듯 양나라 유물이 출토되었다.

묘는 시체를 가매장하고 일정 기간이 지난 다음 발굴하여 뼈를 씻고 장례한 후 다시 매장하는 복장이 가능한 석실묘다. 벽화의 내용면에서 고구려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초창기 고분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것이 대표적인데, 이는 졸본 지방의 고구려 초기 고분과 유사한 적석총이며, 웅진시대의 공주시 송산리 고분굴식 돌방 고분이다.

또한 무령왕릉과 같은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무령왕릉은 연화문의 벽돌로 된 아치형의 벽돌무덤으로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관·석수·청동경·자기·지석·장신구 등이 있는데, 이 고분을 통해 백제의 사회, 양나라와의 문화교류, 장사를 지내는 예법과, 특히 신라와의 문화교류, 문화의 특수성과 공통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고분이다.

또 사비시대의 부여 능산리 고분굴식 돌방고분으로 송산리 고분보다 규모는 작으나 건축기술과 연화문, 운문, 사신도의 벽화가 세련되었다. 그리고 충남 서산에 있는 마애삼존불상은 화강암에 새긴 마애석불인데, 화려한 옷차림, 짙은 미소를 띤 온화함은 ‘불교의 미소’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금동관세음보살입상, 무령왕릉의 출토품인 금제 관식 ·석수 ·동자상, 금은 장식품인 목걸이 ·팔찌 ·귀걸이 등이 유명하며 산수문전 ·연화문전 등과 기와 등에도 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데, 고구려의 와당은 힘과 정열(와당의 귀신상)을 표현한 데 비하여 백제의 와당(기와의 막새나 내림새의 끝에 둥글게 모양을 낸 부분)은 연약함이 특색을 이룬다.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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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금동대향로

그림은 능산리 고분의 연화문 ·운문, 사신도의 벽화와 송산리 고분의 신수도가 우아한 면을 표현해 주고 있다. 그리고 글씨로는 사택지적비(사륙변려체), 무령왕릉의 지석(해서체) 등이 있다.

음악은 5∼6세기에 남송과 북위의 기록에 백제 음악이 적혀 있다. 고 ·각 ·공후 ·쟁 등의 악기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백제의 미마지가 중국 오나라에서 배운 음악 배웠다. 작자 ·연대가 미상인 《정읍사》가 《악학궤범》에 전해지며, 노래의 제목만이 《고려사》 〈악지〉에 전해지는 것으로는 《지리산가》 《무등산가》 《방등산가》 《선운산가》 등이 있다.

교류

백제는 후기부터 을 비롯한 남조의 각국으로부터 문화를 전수받았다. 양나라에는 조공을 보내어 불교 등의 경서와 모시박사·공장·화사를 청하는 등 양의 문화를 수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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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대외 관계

요약
관점

고구려와의 관계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면서 고구려와 백제는 원수지간이 되었다.[29] 광개토왕릉비에는 백제를 백잔(百殘)으로 비하하고 있다. 잔(殘)은 잔인하다, 흉악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6세기 후반 신라가 가야를 점령하며 점차 그 세력을 넓혀가자 백제는 이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와 군사 동맹을 맺었다.[30]

신라와의 관계

중국 왕조와의 관계

진서》에 따르면, 백제가 전성기였던 4세기에 근초고왕은 동진에 사신을 보내서 조공하였다[31] 동진과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투쟁하려고 하는 백제의 사대주의적 외교는 침류왕 대에도 계속되었다. 침류왕 원년 7월에도 백제는 동진에 조공하였다. 게다가 음력 9월에 동진에서 호승(胡僧) 마라난타가 오자, 궁중에 머물게 하고 1급 국빈으로 대접하였다. 470년, 송 왕조 시기에도 사신을 보냈으며, 472년에는 북위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냈다. 그리고 무령왕과 성왕은 양나라에 여러 차례 조공을 보내는 대가로 양나라 귀족 칭호를 하사받았다.

요서경략설

백제가 중국의 랴오시 지방을 점령하고 지배했다는 가설이다. 근거는 《송서》, 《양서》 등의 남조계 사서에 기록된 백제의 요서 지방 점령 기록이나 지리적으로 랴오시 지방과 인접한 북조계 사서에서는 관련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학계에서 논란이 된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하는 《국사》교과서에는 1990년 이전까지 백제가 요서를 정복했다고 서술하고 있었으나 1990년 이후부터는 진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애매모호하게 표현했다.

일반적으로 역사학계에서는 백제의 요서진출을 부정하는 것이 정설이며,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견해도 상업적·군사적인 일시적 진출로 본다.[32] 한편으로 환단고기 등의 의사 역사학을 주장하는 재야사학자들은 백제의 대륙 진출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그 강역에 대해서도 랴오시 지방뿐 아니라 산둥 반도 등 중국 곳곳으로 과장되게 비정하나 역사학계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

요서 진출 시기에 대한 문제도 논란의 대상이 된다. 《송서》, 《양서》 등의 기록에 따르면 대륙 정복 시기는 (晉) 말기로,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이후라고 한다. 고구려가 요동을 명백하게 점령한 시기는 광개토왕 때(391년~413년)의 일로 이 시기의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여 58개 성을 빼앗기는 등 중국을 다스릴 여력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고구려가 385년 일시적으로 요동을 점유하였을 때 백제의 요서 진출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33]

또한 삼국사기, 남제서 등에는 490년에 위나라(북위) 기병의 공격을 백제가 막아낸 기록이 남아 있어 이를 근거로 일각에서는 이 시기까지도 백제가 요서지방이나 기타 해외에 영토를 통치하고 있었음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 기록의 위나라를 고구려의 오기로 보아 인정하지 않는 편이며, 같은 기록에 백제 측의 전공으로 '선박을 쳐부순 것(拔臺舫)'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위나라가 실제로 함대를 보내 백제를 침공해 왔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 등 논란이 매우 많다.[34]

백제의 패망

신라의 백제 정벌의 배경에는 백제의 쇠퇴에 있었다. 당시 백제 의자왕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서 성충흥수 같은 충신들을 귀양 보내 죽이는 등 혼란에 빠져 있었다. 무리한 왕권 강화로 인한 왕자들의 다툼과 귀족들의 분열로 백제는 준내전 상태에 이르렀고, 이 틈을 노려 신라태종무열왕와 동맹국 당나라는 당시 동아시아의 명장이었던 김유신소정방을 필두로 하는 연합군을 구성하였다.

당나라의 고종(高宗)은 신라의 태종무열왕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았고, 태종무열왕의 명령을 받은 대장군 김유신(金庾信)은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7월 9일(음력 5월 26일) 출발하여, 7월 30일(음력 6월 18일) 지금의 이천 지역인 남천정에 대기하였다. 음력 6월, 당나라의 고종(高宗)은 조서를 내려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을 거느리고 군사 13만 명을 통솔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백제 서쪽의 덕적도(德積島)에 이르렀다. 8월 2일(음력 6월 21일) 덕적도에서 신라의 태자 김법민은 신라 제1군 5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 군을 맞이한다. 이때 두 나라의 군대는 8월 21일(음력 7월 10일) 백제 사비성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 제2군 5만 명은 이천에서 남하한 뒤 탄현을 넘어 진격했다. 그리고 태종무열왕의 신라 제3군 10만 명의 주력군이 금성을 출발해 백화산에 진을 쳤다. 그리고 기타 4만 명의 병력 등 총 신라의 18만 대군이 진군했다. 의자왕은 두 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해 준비를 하지 않는 패착을 저질렀다. 이를 뒤늦게 알아차린 의자왕은 연합군의 동향과 대책을 급하게 논의했다. 좌평 의직이 말하기를, “당나라 군은 멀리 아득한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물에 익숙지 못한 자는 배에서 반드시 피곤할 것이다. 그들이 육지에 내렸을 때에는 사기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급히 치면 뜻한 바를 얻을 수 있다. 신라가 강국이라 한들 대국의 후원을 믿고 있는지라, 기강이 약할 것이다. 만일 당군의 위엄이 먼저 떨어진다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할 것이므로 빠르게 진격하지는 못할 것이다. 고로 먼저 당군과 결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반면 달솔 상영은 “그렇지 않다. 당군은 멀리서 와서 속히 싸우려 할 것이니, 그 예봉(銳鋒)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백제군은 신라군에게 이겨본 적도 있으므로, 저들의 위세에 두려워하면 안된다. 오늘의 계책은 마땅히 당군의 길을 막아 그 군사가 쇠약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먼저 절반의 군사로 하여금 신라군을 치게 하여, 그 예기(銳氣)를 꺾은 연후에 형편을 엿보아 세력을 합하면, 군사를 온전히 하고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라 하였다. 의자왕은 몹시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한편 좌평 흥수가 죄를 얻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 유배되어 있었다. 사람을 보내 그에게 물었고, 흥수가 이르기를 “당병은 원래 수가 많고 군율이 엄하고 강하다. 더구나 신라와 연합하여 기각(掎角)을 이루니 평원에서 전면전을 벌인다면 반드시 우리가 질 것이다.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은 우리 나라의 요로(要路)이다. 백제군이 먼저 주둔하여 당병이 백강(白江)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이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하면서, 여러 겹으로 막아서 굳게 지키다가 그들의 재물과 양곡이 다하고 사졸이 지치기를 기다린 연후에 힘을 떨쳐 그들을 치면 반드시 깨뜨릴 것이다.”라 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은 흥수의 말을 평가하기를, “흥수는 묶여있은 지 오래이므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므로 믿을 수가 없다. 당병이 물결을 따라 백강(白江)으로 들어오게는 하되 배를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이 탄현(炭峴)으로 올라오게는 하되 좁은 길을 따라 말을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낫다. 이때 군사를 거느리고 친다면, 새장 안의 닭이나 그물 안의 물고기를 죽이는 것과 같다.”라 하였다. 의자왕은 대신들의 고언을 채택하였고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난 연합군에 맞서기 위해, 좌평 충상과 달솔 상영, 계백으로 하여금 5천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에 나아가 신라군을 막게 하였고, 좌평 의직으로 하여금 2만 결사대로 백강을 막게 하였다. 그러나 당군은 백강에서 의직의 2만 백제군은 전멸시키고, 신라군보다 먼저 사비성에 이르렀다.

642년(의자왕 2)에 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하며 신라를 압박했다.[15] 신라는 고구려의 힘을 빌리려 하였으나 실패하고[16] 에 연합을 요청한다.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당 태종의 신임을 얻고, 나·당 간의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660년 당 고종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책총관(神丘道行策摠管)으로 삼고 유백영(劉伯英), 풍사귀(馮士貴) 등과 함께 1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정벌을 명령하였다.[17] 태종무열왕김유신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고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당군과 합세하게 하였다.[17] 당나라는 수로를 통해 백제의 백강(白江)으로 진격하였고, 신라의 5만 정예군은 육로를 통해 백제의 탄현(炭峴)[주 6]으로 진격하였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 방면으로 진군하자, 의자왕은 신료들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좌평 의직(義直)은 당군과 먼저 결전할 것을 주장했고, 달솔 상영(常永)은 신라 정예군을 우선 막을 것을 주장하여 분열이 일어났다.[15] 또한, 귀양 중이던 흥수(興首)는 평야에서 접전하면 불리하므로 백강과 탄현을 선점해 연합군이 피곤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자고 건의한 반면, 대신들은 연합군이 각각 백강과 탄현을 오른 뒤에 공격하는 것이 이롭다고 주장했다.[15]

이렇게 의견이 나뉘어 싸우는 동안 연합군은 요충지인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을 넘어 왔다. 신라군의 진군로는 경주,보은,이천에서 진군하다 회군하여 다시 이천,보은,굴산성(이성산성),영동,옥천,탄현,테미고개,정림동고개,갑천,흑석동산성 석고개,두계천,양정고개,연산시장3거리(황산벌),연산천으로 진군하였다. 이에 의자왕은 급히 계백을 황산벌로 보내 신라군을 막게 하였다.

계백은 죽음을 각오한 군사 5천 명을 뽑아 출전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한 나라의 사람으로서 당과 신라의 대규모 병력을 맞게 되었으니, 국가의 존망(存亡)을 알 수 없다. 내 처와 자식들이 잡혀 노비(奴婢)가 될까 염려된다.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죽어서 흔쾌한 편이 나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가족을 모두 살해하였다.[18] 계백의 전설은 후기에 신라의 의해 만들어졌다는 견해도 있다. 즉 계백이 출전 전에 가족부터 몰살했다는 것은 개연성이 부족하다. 계백같은 충신이 있었어도 의자왕의 무능력함을 부각시켜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의 멸망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란 견해다.

8월 20일(음력 7월 9일) 신라의 5만 정예군이 황산벌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은 연산시장 3거리를 기준으로 반경 500m 내외의 3곳에 진영을 두고 있었다. 당시 좌평 충상이 백제군을 지휘하였고, 달솔 상영과 달솔 계백충상의 부하 장수였다.[주 7]

황산벌에 도착한 계백은 “지난 날 구천(句踐)은 5천 명으로 오나라 70만의 무리를 격파하였다. 지금 오늘 마땅히 각자 힘써 싸워 승리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36]며 병사들을 독촉했고, 이에 백제 군사는 사기가 올라 네 번의 소전투에서 신라군을 막아내었다.

신라군은 1차, 2차 공격에서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의 아들 반굴(盤屈)이 신라 우군과 함께 전장에 투입되어 백제 병사들을 여럿 죽이고 자신도 전사했다. 신라군의 3차, 4차 공격에서 김유신의 조카인 좌장군 김품일이 16세의 아들 관창(官昌)의 신라 좌군과 함께 투입되었다고 관창 또한 죽임을 당한다. 관창은 갑옷을 입힌 말을 타고 적진으로 달려 가서 싸우다가 적에게 사로잡히고 계백에게 끌려갔다.[37]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였는데, 그 나이가 어리고 용감함에 감탄하며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신라에게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장정들이랴!”라 하고 살려서 보내도록 하였다.[38]

신라 정예군 진영으로 돌아간 관창은 품일에게 간단한 인사만 하고 다시 돌격하였고, 계백은 백제 병사들을 계속 죽인 관창의 목을 베었다. 오랜 진군으로 지쳐있던 신라군은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를 회복하였고 김유신은 5차 공격을 총공격으로 밀어붙였고, 결국 백제군은 패배하고 계백도 전사하였다.

소정방은 김유신 등이 약속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 독군(新羅督軍) 김문영(金文穎)을 참수하려 하였다. 김유신은 “대장군(大將軍)이 황산(黃山)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한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를 삼으려고 하는데, 나는 죄가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의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라고 하였다.[39] 이 말을 들은 동보량(董寶亮)이 소정방에게 귓속말로 “신라의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합니다.”라고 하자 소정방이 김문영을 풀어주었다.[39]

11월에 전공을 논하게 되었는데 신라태종무열왕은 항복한 충상, 상영 등을 예우해주는 차원에서 왕족을 제외한 가장 높은 신분인 6두품과 제7관등인 일길찬의 관직을 주고, 항복한 백제 귀족들에게도 그에 걸맞은 두품과 관직을 하사하였다.[40] 하지만 충상과 상영 그리고 이들을 따르던 백제군은 신라군의 투항권유를 받고 항복하였기에 패배한 적장에게 신라는 높은 품계의 벼슬을 준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 계백과 그를 따르던 병사들은 수락산까지 밀리면서 전멸한 것으로 보인다.

전사한 관창(官昌)은 급찬(級湌)에 추증하고 예로써 장례를 지내 주었으며, 그 집에는 비단 3십 필, 승포 3십 필과 곡식 1백 섬을 내려 주었다.[41]

황산벌에서 5천의 백제군은 작은 전투를 네 번 이겼으나 전면전에서 김유신의 전술에 당하여 전멸하고, 계백은 사망했다. 그러나 충상상영은 항복하였다. 이후 김유신은 웅진강(熊津江) 입구에, 소정방은 도성(都城) 30리쯤 되는 곳에 주둔했다. 백제군이 연합군의 진격을 막았으나 번번히 패했다. 660년 음력 7월 13일, 의자왕은 태자 와 함께 북쪽 변경의 웅진성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흑치상지와 함께 반격을 준비 하였다. 김유신소정방은 사비성을 포위했고, 왕자 는 스스로 즉위하여 왕이 되어 상좌평 천복과 함께 사비성을 방어하였다. 그러나 태자의 아들 문사와 대좌평 천복, 왕자 를 경계하며 신라군에게 항복했다. 법민(法敏)이 을 말 앞에 꿇어 앉히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어 말하기를,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원통히 죽여 옥중에 파묻은 일이 있었는데,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을 아프게 하고 머리를 앓게 하였다. 오늘 너의 목숨은 내 손에 달려 있다 "고 하니 부여융은 땅에 엎드려 사죄하였다. 드디어 연합군은 사비성을 함락시켰고, 660년 음력 7월 18일, 웅진성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반격을 준비하던 의자왕은 웅진성주 예식진의 배신으로 나당 연합군에게 건네지게 된다. 7월 29일, 태종무열왕은 금돌성(今突城)에서 소부리성(所夫里城)에 이르러, 제감(弟監) 천복(天福)을 당나라에 보내 싸움에서 이겼음을 알렸다. 660년 음력 8월 2일, 연합군은 주연(酒宴)을 크게 베풀고 장병들을 위로하였다. 태종무열왕김유신, 소정방 등 연합군 장수들은 당상(堂上)에 앉고, 의자왕은 당 아래에 앉혀서 단체로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좌평 등 여러 신하 중 목이 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날 대야성(大耶城)의 검일과 함께 백제군과 내통한 모척을 붙잡아서 목을 베었다. 또한 검일을 문책하며,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의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에 불을 질러서 없앴기 때문에 온 성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이고, 품석(品釋) 부부를 윽박질러서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고, 백제와 더불어서 본국을 공격하였으니 그것이 세 번째 죄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사지를 찢어서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660년 음력 9월 3일, 낭장(郎將) 유인원이 군사 1만 명으로 사비성에 남아서 지켰는데, 신라의 왕자 김인태가 사찬(沙湌) 일원(日原), 급찬(級湌) 길나(吉那)와 함께 군사 7000명으로써 보좌하였다.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족⋅신료 93명, 백제인 1만 2000명을 데리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김인문과 사찬 유돈(儒敦), 대나마(大奈麻) 중지(中知) 등이 동행했다.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하여 660년 멸망하였다.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제31대 의자왕(재위 641~660)은 태자 때 부모에게 효성스러웠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돈독했었다고 한다. 의자왕은 즉위 이듬 해 7월 자신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함락시키는 대성과를 거두었으며, 8월에는 윤충을 보내 대야성(합천)을 함락시킨다. 이후에도 신라의 서부지역에 대한 공략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의자왕은 전투에서 계속 승리를 하게 되자 어느덧 자만심에 빠져 독재군주로서의 한계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상황은 왕비의 지나친 권력욕에 의한 국정운영을 통해 나타났다. 또한 의자왕은 당시 삼국을 둘러싼 국제관계의 변화에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 당시 수세에 놓여 있던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에 대한 압력을 요구하였으며, 이에 당에서는 백제에게 신라와 화평관계를 유지하도록 요구하였으나 의자왕은 이를 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652년 이후 더 이상 사신을 보내지 않음으로써 당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이에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공략하였다. 백제는 계백이 이끄는 5천결사대가 황산벌에서 신라 5만군을 저지하였으나 실패하고, 신라와 당나라 군은 사비도성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660년 7월 12일 나·당연합군이 사비도성에 이르자 13일에 의자왕은 태자 효와 함께 북방 웅진성으로 피신하고 나당군은 사비성을 포위하여 결국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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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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