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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전쟁

동남유럽의 일련의 전쟁 (1991년~2001년)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유고슬라비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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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전쟁은 1991년부터 2001년까지[A 2]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SFR 유고슬라비아)이었던 지역에서 발생한 일련의 분리되었지만 서로 연관된[10][11][12] 여러 민족 분쟁, 독립 전쟁, 분란전이다. 전쟁은 1991년 중반부터 시작된 유고슬라비아의 붕괴로 이어졌고, 이전 유고슬라비아를 구성했던 6개의 공화국에 해당하는 6개의 독립국, 즉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마케도니아(현재 북마케도니아로 불림)로 분열되었다. SFR 유고슬라비아의 구성 공화국들은 민족주의의 고조로 독립을 선언했다. 새로운 국가에서 민족 소수자 간의 미해결된 긴장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대부분의 분쟁은 새로운 국가의 완전한 국제적 승인을 포함하는 평화 협정을 통해 끝났지만, 엄청난 수의 사망자와 이 지역에 심각한 경제적 피해를 초래했다.

간략 정보 유고슬라비아 전쟁, 날짜 ...

유고슬라비아 붕괴 초기 단계에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JNA)은 공화국 정부의 모든 민족주의자를 숙청함으로써 유고슬라비아 국가의 통일을 보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JNA는 약화되는 공산주의 체제의 이념적 대체물로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내세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영향력 아래 점점 더 놓이게 되었다. 그 결과 JNA는 슬로벤인, 크로아트인, 알바니아계 코소보인, 보슈냐크인, 마케도니아인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으며, 사실상 세르브인몬테네그로인으로만 구성된 전투 병력이 되었다.[13] 1994년 유엔 (UN) 보고서에 따르면 세르브 측은 유고슬라비아를 재건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고, 대신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일부 지역을 점령해 "대세르비아"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14] 다른 민족통일주의 운동도 유고슬라비아 전쟁과 관련하여 언급되었는데, 예를 들어 (코소보로부터의, 국제적 외교 노선 이후 포기한) "대알바니아"[15][16][17][18][19] (헤르체고비나 일부 지역으로부터의, 1994년 워싱턴 협정으로 포기한) "대크로아티아"가 있다.[20][21][22][23][24]

종종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사망자가 많은 무력 분쟁 중 하나로 가리키는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집단학살, 인도에 반한 죄, 민족 청소, 학살, 집단 전시 성폭력을 포함한 많은 전쟁범죄로 특징지어진다. 보스니아 집단학살나치 독일의 군사 작전 이후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집단학살적 성격을 띠는 것으로 분류된 유럽 전시 사건이었고, 이를 저지른 많은 핵심 인물은 나중에 전쟁 범죄로 기소되었다.[25] 유엔이 분쟁 중 전쟁 범죄를 저지른 모든 사람을 기소하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ICTY)를 설립했다.[26] 국제 전환기 정의 센터에 따르면,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14만 명의 사망자를 냈고,[6] 인도주의법 센터는 최소 13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추정한다.[7] 10년 동안의 분쟁은 대규모 난민 및 인도주의적 위기를 초래했다.[27][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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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다음과 같이도 불린다.

  • "발칸반도 전쟁"
  • "구유고슬라비아 전쟁/분쟁"[6][30]
  • "유고슬라비아 분리/계승 전쟁"
  • "제3차 발칸 전쟁": 영국 언론인 미샤 글레니의 저서 제목에 포함된 용어로,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치러진 이전 두 발칸 전쟁을 암시한다.[31] 그러나 일부 현대 역사학자는 이 용어를 제1차 세계 대전에도 1912~13년 전쟁의 직접적인 후속 전쟁이라고 믿기 때문에 적용했었다.[32]
  • "유고슬라비아/유고슬라비아 내전", "유고슬라비아 내전"

배경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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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에서 1992년 사이 6개 유고슬라비아 공화국(두 자치주는 제외)의 국기 지도[33]

유고슬라비아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수립되었으며, 인구는 주로 남슬라브계 기독교인으로 구성되었지만 상당한 이슬람교 소수자도 있었다. 유고슬라비아 민족 간의 명확한 민족 분쟁은 20세기에 들어서야 두드러졌는데, 1920년대 초 세르브인 크로아트인 슬로벤인 왕국 헌법을 둘러싼 긴장으로 시작하여 1920년대 후반 크로아티아 정치인 스티판 라디치의 암살 이후 세르브인과 크로아트인 간의 폭력으로 확대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1918년부터 1941년까지 존속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크로아티아 파시스트 우스타샤 (1929년 창설)의 지원을 받은추축국의 침공을 받았다. 우스타샤의 정권세르브인, 유대인, 롬인에 대한 집단학살을 자행했으며, 강제 수용소에서 사람들을 처형하고 영토 내에서 다른 체계적이고 대규모 범죄를 저질렀다.[10]

주로 세르브인으로 구성된 체트니크는 유고슬라비아 왕실주의 및 세르비아 민족주의 운동이자 유격대로, 여러 역사학자가 집단학살로 간주하는 무슬림과 크로아트인에 대한 대규모 범죄를 저질렀으며, 또한 세르비아 군주제와 유고슬라비아 연방 수립을 지지했다.[34][35]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이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세르브인, 크로아트인, 보슈냐크인을 포함한 모든 집단에 호소할 수 있었고, 또한 대규모 살인을 저질렀다.[36] 1945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 아래 유고슬라비아 연방인민공화국 (FPRY)이 수립되었고,[10] 티토는 내셔널리즘을 억압하는 강력한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유지했다.[37]

1980년 티토 사망 이후, 연방 6개 공화국 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코소보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내에서 더 큰 자치권을 원했지만, 세르비아는 연방 권한을 강화하려고 했다. 모든 당사자가 동의할 수 있는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독립으로 나아갔다. 1980년대 초부터 유고슬라비아의 긴장이 고조되었지만 1990년에 일어난 여러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경제적 어려움과 1989년 동유럽의 공산주의 붕괴 속에서 유고슬라비아는 다양한 민족 집단 간의 민족주의 고조에 직면했다. 1990년대 초에는 연방 차원에서 효과적인 권위가 없었다. 연방 대통령직은 6개 공화국, 2개 자치주,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대표로 구성되었고, 공산주의 지도부는 민족적 노선에 따라 분열되었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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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에 거주하는 세르브인의 분포 (세르비아 삼색기로 표시)

보이보디나, 코소보 및 몬테네그로 대표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의 충성파로 교체되었다. 세르비아는 8개 연방 대통령직 투표 중 4개를 확보하여[39] 연방 차원에서 의사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데, 다른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은 모두 한 표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다당제를 허용하려 했지만, 밀로셰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는 훨씬 더 중앙집권적인 연방과 그 안에서 세르비아의 지배적인 역할을 요구했다.[38]

1990년 1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제14차 임시 대회에서 세르비아가 지배하는 의회는 단일 정당 체제를 폐지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지부당 (세르비아 공산주의자동맹)의 수장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당 대표의 다른 모든 제안을 막고 부결시켰다. 이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대표단이 퇴장하는 계기가 되었고, 따라서 당의 분열이 일어났으며[40] 이는 "형제애와 통일"의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1990년에 실시된 유고슬라비아 시민 설문조사에 따르면 민족적 적대감은 작은 규모로 존재했다.[41] 25년 전 결과와 비교했을 때, 세르브인몬테네그로인크로아트인슬로벤인에 대해 느끼는 민족적 거리감이 현저히 증가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41]

1991년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유고슬라비아 연방 정부는 임박한 국가 해체를 강제로 막으려 했고, 유고슬라비아 총리 안테 마르코비치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분리가 모두 불법적이며 유고슬라비아 헌법에 위배된다고 선언하며 유고슬라비아의 완전한 통일을 보장하기 위해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42] 슬로벤인(밀란 쿠찬과 로이제 페테를레가 대표)[43][44]과 크로아트인은 이 행위가 연방이 원래 민족의 자발적 연합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분리가 아니라 유고슬라비아로부터의 해산(슬로베니아어: razdruževanje, 크로아티아어: razdruživanje)이라고 주장했다.[45] 유고슬라비아 평화 회담 중재위원회는 1991년 11월에 이 행위가 분리독립이 아니라 제2차 유고슬라비아 헌법에 명시된 '연방 해산'이라고 판결했다.[46]

"파르티잔: 발칸 전쟁 1941-1945"의 저자 스티븐 A. 하트(Stephen A. Hart)에 따르면 달마티아의 민족 혼합 지역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곳에 살던 크로아트인과 세르브인 사이에 긴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통일 유고슬라비아의 많은 초기 지지자는 달마티아 출신 크로아트인인 안테 트룸비치와 같은 이 지역 출신이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발발할 무렵에는 달마티아의 크로아트인과 세르브인 간의 우호적인 관계는 무너졌고, 달마티아 세르브인은 자칭 준국ㄴ가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편에서 싸웠다.

유고슬라비아의 사회주의 시기 전반에 걸친 정책이 (즉, 모든 세르브인이 한 국가에 살아야 한다는) 동일한 것처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학자 데얀 구지나(Dejan Guzina)는 "사회주의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의 각 하위 기간의 다른 맥락은 전적으로 다른 결과(예: 유고슬라비아를 지지하거나, 대세르비아를 지지하는)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세르비아의 정책이 초기에는 보수-사회주의에서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는 외국인 혐오적 민족주의로 바뀌었다고 가정한다.[47]

민족주의의 부상과 함께 "민족-성직주의"도 부상했으며, 세르비아 정교회는 코소보,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대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정권의 공격과 크로아티아의 로마 가톨릭교회유고슬라비아 이슬람 공동체의 크로아트인과 보슈냐크인의 각 정치적 대의에 대한 개입에 연루되었다.[48][49][50]

세르비아와 세르브인이 지배하는 지역에서는 특히 민족주의자와 세르비아 정부 및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세르브 정치 단체를 비판하는 비민족주의자 사이에 폭력적인 대립이 발생했다.[51]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 민족주의 정치 분위기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세르브인은 괴롭힘, 위협, 살해를 당했다고 보고되었다.[51] 그러나 밀로셰비치의 권력 장악과 유고슬라비아 전쟁 발발 이후 세르비아에서는 수많은 반전 운동이 나타났다.[52][53]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행동에 반대하는 반전 시위가 열렸으며, 시위대는 전쟁 선포에 대한 국민투표군 징집 중단을 요구했고 이는 수많은 탈영과 이민으로 이어졌다.[54][55][56]

유고슬라비아 위기가 고조되면서 JNA은 사실상 세르브계가 지배했다. 전 자그레브 제5군 사령관 마르틴 슈페겔에 따르면 이전에는 지휘직의 50%가 크로아트인이었으나, 몇 년 후 전쟁이 시작될 무렵에는 모든 핵심 직위가 세르브인이 차지했다.[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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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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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슬로베니아 독립 전쟁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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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국경 근처 노바고리차에서 매복 공격을 받은 JNA 전차

10일 전쟁으로 알려진 첫 번째 분쟁은 슬로베니아가 1991년 6월 25일 연방에서 분리된 후 1991년 6월 26일 JNA(유고슬라비아 인민군)가 침공하며 시작되었다.[58][59]

처음에 연방 정부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에게 슬로베니아 국경 검문소를 확보하도록 명령했다. 슬로베니아 경찰과 슬로베니아 공화국 영토방위군은 막사와 도로를 봉쇄하여 공화국 전역에서 대치와 제한적인 충돌이 발생했다. 수십 명의 사상자 발생 후 제한적인 충돌은 1991년 7월 7일 브리오니에서의 협상을 통해 중단되었고,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분리에 대해 3개월간 유예할 것을 동의했다. 연방군은 1991년 10월 26일까지 슬로베니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1991년~19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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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브로브니크 폭격 이후의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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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1월 부코바르에서 크로아티아 병사들이 설치한 지뢰로 파손된 JNA M-84 전차

크로아티아에서의 전투는 슬로베니아의 10일 전쟁이 시작되기 몇 주 전부터 시작되었다.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은 크로아티아의 세르브인크로아티아의 독립에 반대하며 크로아티아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하면서 시작되었다.

1990년 크로아티아 의회 선거에서 프라뇨 투지만이 초대 크로아티아 대통령이 되었다. 투지만은 크로아트인 민족주의 정책을 추진하며 독립 크로아티아 건국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새 정부는 헌법 개정을 제안하고, 전통적인 크로아티아 국기국장을 복원하며, 공화국 이름에서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삭제했다.[60] 새 크로아티아 정부는 공공 기관 서신에서 세르비아 키릴 문자를 제거하는 등 공개적으로 민족주의적이고 반세르비아적인 정책을 시행했다.[61][62] 헌법 변경에 맞서기 위해 지역 세르브인 정치인은 1990년 8월 17일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 민족의 주권 및 자치"에 대한 국민투표를 조직했다. 이들의 보이콧은 크닌 주변의 세르브인 거주 지역에서 봉기로 확대되었는데, 이를 통나무 혁명이라고 한다.[63]

크닌 지역 경찰은 증가하는 세르비아 반군에 동조했고, 주로 세르브인이 지휘 직책을 맡고 있던 많은 정부 직원, 특히 경찰관이 직장을 잃었다.[64] 1990년 12월 새로운 크로아티아 헌법이 비준되었고 세르브 민족평의회는 자칭 세르비아 자치 지역인 크라이나 세르브인 자치주를 결성했다.[65]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양측의 선전으로 민족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1991년 5월 2일, 세르브 준군사조직과 크로아티아 경찰 간의 첫 무장 충돌 중 하나인 보로보셀로 전투가 발생했다.[66] 5월 19일에는 독립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는데,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에 의해 대부분 보이콧되었으며, 대다수는 크로아티아의 독립에 찬성표를 던졌다.[67][65] 크로아티아는 1991년 6월 25일 독립을 선언하고 유고슬라비아와의 연합을 해체했다. 브리유니 협정에 따라 3개월간의 결정 시행 유예 기간이 있었고, 이는 10월 8일에 종료되었다.[68]

1991년 초의 무장 충돌은 여름 동안 전면전으로 확대되었으며, 분리된 크라이나 세르브인 자치주 주변 지역에서 전선이 형성되었다. JNA는 독립 선언 이전에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명령에 따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영토방위군 부대를 무장 해제했다.[69][70] 이는 UN이 유고슬라비아에 부과한 무기 금수 조치로 인해 크게 악화되었다. JNA는 겉으로는 이념적으로 통합주의였지만, 장교단은 주로 세르브인 또는 몬테네그로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70%).[71]

그 결과 JNA는 크로아티아의 독립에 반대하며 크로아티아 세르브 반군 편에 섰다. 크로아티아 세르브 반군은 JNA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금수 조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1991년 7월 중순까지 JNA는 약 7만 명의 병력을 크로아티아로 이동시켰다. 전투는 빠르게 확대되어 서부 슬라보니아에서 바니야를 거쳐 달마티아에 이르는 수백 제곱킬로미터에 걸쳐 발생했다.[72]

국경 지역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내부의 병력으로부터 직접적인 공격을 받았다. 1991년 8월, 부코바르 전투가 시작되었고 약 1,800명의 크로아트인 병사가 JNA의 슬라보니아 진격을 막으면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10월 말까지 도시는 육상 포격과 공중 폭격으로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73] 두브로브니크 포위전은 10월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두브로브니크에 대한 포격으로 시작되었는데, 국제 언론은 많은 민간인이 살해된 부코바르 파괴를 보도하는 대신 도시의 건축 유산에 초점을 맞춘다는 비판을 받았다.[74]

1991년 11월 18일, 부코바르시의 탄약이 고갈되면서 부코바르 전투는 끝났다. JNA가 부코바르를 점령한 직후 오브차라 학살이 발생했다.[75] 한편, 라트코 믈라디치의 지휘 아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JNA 군단과 함께 크로아티아 세르브인 부대가 크로아티아 중앙부를 장악했다.[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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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수냐의 파괴된 세르브인 가옥. 대부분의 세르브인은 1995년 폭풍 작전 중 도피했다.

1992년 1월, 밴스 계획은 세르브 반군이 자칭 준국가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으로 주장하는 영토에 세르브인을 위한 UN 통제 (UNPA) 구역을 설정하고 주요 군사 작전을 중단시켰지만, 크로아티아 도시에 대한 산발적인 포격 공격과 크로아티아 군의 UNPA 구역 침입은 1995년까지 계속되었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의 크로아티아 인구 대다수는 심각한 고통을 겪었고, 수많은 살해로 인해 도피하거나 추방되었으며 이는 민족 청소로 이어졌다.[77]

크로아티아에서의 전투는 1995년 중반 플래시 작전폭풍 작전 이후에 종료되었다. 이 작전이 끝날 무렵,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와 국경을 접하는 동부 슬라보니아의 UNPA 동부 구역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되찾았다.

이 공세 동안과 이후에, 이전 크라이나 세르브인 자치 공화국 지역에 거주하던 약 150,000~200,000명의 세르브인이 민족 단위로 추방되었고, 크로아티아 군은 일부 남아있는 민간인에 대한 여러 범죄를 저질렀다.[78] 크로아티아 세르브인들은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 유럽에서 가장 큰 난민 인구가 되었다.[79]

크로아티아 군사 작전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동부 구역" 지역은 유엔 행정부 (유엔 동슬라보니아 바라냐 서시르미움 과도행정기구) 관할 하에 놓였으며, 에르두트 협정 조건에 따라 1998년에 크로아티아에 재통합되었다.[80]

보스니아 전쟁 (1992년~1995년)

1992년 4월 2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잔존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분쟁이 확산되었다. 이 전쟁은 주로 새로 독립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의 영토 보전을 원하는 보슈냐크인과 자칭 보스니아계 세르브인 준국가 스릅스카 공화국, 자칭 크로아트 헤르체그보스니아 사이의 영토 분쟁이다. 이들은 각각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지휘와 보급을 받았으며 보슈냐크인의 작은 땅만 남기고 보스니아 분할을 목표로 했다고 보고되었다.[81] 1992년 12월 18일 유엔 총회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군이 무력으로 더 많은 영토를 획득하려 한 것을 비난하는 결의안 47/121을 발표했다.[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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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사라예보 포위전 중 물을 길기 위해 줄 서 있는 사람들

유고슬라비아 군대는 주로 세르브인이 지배하는 군대로 해체되었다. JNA는 보스니아 다수 민족이 주도하는 정부의 독립 의제에 반대했고, 다른 무장 민족주의 세르브 민병대와 함께 1992년 독립 국민투표에서 보스니아 시민이 투표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83] 그들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투표하지 못하게 하는 데 실패했고, 대신 위협적인 분위기와 세르브인의 투표 보이콧이 합쳐져 독립에 대한 99%라는 압도적인 찬성표가 나왔다.[83]

1992년 6월 19일 보스니아에서 전쟁이 발발했지만, 사라예보 포위전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독립을 선언한 후인 4월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수년간의 사라예보 포위전과 스레브레니차 집단학살로 특징지어지는 이 분쟁은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 가장 유혈이 낭자하고 가장 광범위하게 보도된 전쟁이었다. 극단적 민족주의자 라도반 카라지치가 이끄는 보스니아 내 세르브인 파벌은 보스니아의 모든 세르브인 지역이 보스니아 다수 보슈냐크 정부로부터 독립할 것을 약속했다. 세르브인이 거주하는 흩어진 지역과 세르브인이 주장하는 지역을 연결하기 위해 카라지치는 학살과 보슈냐크인 강제 추방을 통해 주로 보슈냐크인에 대한 체계적인 민족 청소 정책을 추구했다.[84] 프리예도르 민족 청소, 비셰그라드 학살, 포차 인종청소, 도보이 인종청소, 즈보르니크 학살, 고라주데 포위전 등이 보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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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유고슬라비아 전쟁 전선의 국기 지도

1992년 말, 크로아트계 보스니아인과 보슈냐크인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그들의 협력은 무너졌다. 1993년 1월 두 전 동맹국은 공개적인 분쟁에 휘말렸고, 이는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으로 이어졌다.[85] 1994년 미국은 워싱턴 협정을 통해 크로아티아군과 보스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군 사이에 평화를 중재했다. 성공적인 플래시 작전과 폭풍 작전 이후, 크로아티아군과 보스니아-크로아트 연합군은 1995년 9월 미스트랄 작전이라는 암호명의 작전을 수행하여 보스니아 세르브군을 후퇴시켰다.[86]

지상 진격과 함께 NATO 공습은 보스니아 세르브인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었다. 모든 측에 휴전을 고수하고 보스니아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협상에 참여하라는 압력이 가해졌다. 전쟁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의 독립적인 실체로서 스릅스카 공화국의 형성과 함께 1995년 12월 14일 데이턴 협정 서명으로 끝났다.[87] 전쟁 종식과 함께 데이턴 협정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헌법도 제정했다. 이 헌법은 컨소시에이셔널(consociational) 성격을 띠며 보슈냐크인, 크로아트인, 세르브인을 "구성 민족"으로 지칭하며 각 민족 집단에 정부에서 광범위한 거부권을 부여한다.[88] 2000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헌법재판소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스릅스카 공화국이 모든 "구성 민족"이 전국적으로 완전한 평등을 누릴 자격이 있음을 인정하도록 요구했다.[89] 마찬가지로 헌법 제10조는 제2조에 정의된 권리와 자유가 변경될 수 없다고 선언한다.[90] 이러한 특징은 다른 민족 집단 간의 불신을 해소하고 지속적인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헌법 전반에 걸쳐 흔히 나타난다.[91]

미국 중앙정보국 (CIA)은 1995년 4월 (스레브레니차 집단학살 3개월 전)에 그 시점까지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발생한 모든 잔학 행위의 거의 90%를 세르브 민병대가 저질렸다고 보고했다.[92] 이 잔학 행위의 대부분은 보스니아에서 발생했다.

코소보 분란 (1995년~1998년)

1990년 9월 1974년 유고슬라비아 헌법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영향으로 일방적으로 폐지된 후 코소보의 자치권은 침해당했고, 이 지역은 국가가 조직한 억압에 직면했다. 1990년대 초부터 알바니아어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제한되었고 신문은 폐쇄되었다. 알바니아계 코소보인은 은행, 병원, 우체국, 학교를 포함한 공공 기업 및 기관에서 대량으로 해고되었다.[93] 1991년 6월, 프리슈티나 대학교 의회와 여러 학부 위원회가 해체되고 세르브인으로 대체되었다. 알바니아계 코소보인 교사는 1991년 9월부터 시작되는 새 학년도에 학교 건물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고, 학생들은 집에서 공부해야 했다.[93]

이러한 알바니아 민족에 대한 탄압은 긴장 고조, 폭동, 폭력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전쟁 전 시기로 알려져 있으며, 이 시기에 코소보 해방군 (KLA)이 결성되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알바니아 민족 민간인에 대한 학대와 살인에 대한 보복으로 세르비아 보안군 및 비밀 요원에 대한 공격이 있었고, 세르비아 민간인도 살해되었다.[94] KLA는 미국과 NATO의 개입을 바라며 지역을 불안정하게 만들려고 했다.[95] 1995년에는 세르비아 순찰대가 매복 공격을 받았고 경찰관이 살해되었는데,[95] 한 명의 사망은 KLA가 저질렀다고 알려졌다.[96] KLA가 이 공격에 대한 책임을 인정한 것은 다음 해에 이르러서였다.[96]

원래 수백 명의 알바니아 민병대로 구성된 KLA는 1996년~1997년에 여러 경찰서를 공격하여 많은 경찰관에게 부상을 입혔다.[97] 1996년 2월, KLA는 경찰서와 유고슬라비아 정부 직원을 대상으로 일련의 공격을 감행하며, 유고슬라비아 당국이 민족 청소 작전의 일환으로 알바니아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98] 1996년 4월 22일, 코소보 여러 지역에서 세르비아 보안 요원을 대상으로 한 네 건의 공격이 거의 동시에 발생했다.

1997년 1월, 세르비아 보안군은 프리슈티나와 미트로비차 사이의 고속도로 공격에서 KLA 사령관 자히르 파야지티와 다른 두 지도자를 암살하고 100명 이상의 알바니아 무장대원을 체포했다.[99] KLA의 창립자이자 지도자 중 한 명인 아뎀 야샤리는 1997년 7월 11일 유고슬라비아 법원에서 테러리즘 혐의로 궐석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휴먼 라이츠 워치는 나중에 야샤리와 다른 14명의 알바니아계 코소보인이 유죄 판결을 받은 이 재판을 "국제 기준에 미달한다"고 비판했다.[100]

NATO의 북대서양이사회는 KLA가 "폭력의 주된 주동자"이며 "고의적인 도발 작전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101] 세르비아 경찰관 살해 혐의로 야샤리를 추적하던 세르비아군은 1998년 1월 22일 프레카즈 야샤리 거점에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102] 1991년에서 1997년 사이, 주로 1996년~1997년에 KLA의 공격으로 39명이 살해되었다.[103] 1996년과 1998년 2월 사이의 공격으로 경찰관 10명과 민간인 24명이 사망했다.[96]

코소보 전쟁 (1998년–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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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3월 31일 미국 전함 USS 곤살레스의 후방 미사일 데크에서 발사되는 토마호크 미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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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NATO 폭격 이후 세르비아 노비사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1998년 10월 15일 KLA와 유고슬라비아군 사이에 NATO가 중재한 휴전이 체결되었으나, 양측은 두 달 후 이를 위반하고 전투를 재개했다. 1999년 1월 라차크 학살에서 45명의 알바니아계 코소보인이 살해되었다는 보고가 있자, NATO는 양측을 강제로 전쟁을 막기 위한 평화 유지군 투입만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104] 유고슬라비아는 랑부예 협정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는데, 이 협정은 코소보에 3만 명의 NATO 평화 유지군 주둔, 유고슬라비아 영토 내 NATO군의 방해받지 않는 통행권, 유고슬라비아 법에 대한 NATO 및 그 대리인의 면책권, 무상으로 지역 도로, 항구, 철도, 공항을 사용하고 공공 시설을 징발할 권리 등을 요구했다.[105][106] 이에 NATO는 폭격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거부권을 이용하여 무력으로 평화 유지군을 설치할 준비를 했다.

이어서 NATO의 유고슬라비아 공습이 발생했는데, 이는 웨슬리 클라크 장군의 지휘 아래 주로 폭격 작전을 통한 세르비아군에 대한 개입이었다. 적대 행위는 2+12개월 후 쿠마노보 협정으로 종료되었다. 코소보는 유엔 코소보 임시행정부의 정부 통제와 코소보군 (KFOR)의 군사 보호 아래 놓였다. 15개월간의 전쟁으로 양측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이 살해되었고 백만 명 이상이 피난민이 되었다.[104]

프레셰보 계곡 분란 (1999년~2001년)

프레셰보 계곡 분란은 1999년 6월부터 시작된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과 프레셰보 메드베자 부야노바츠 해방군 (UÇPMB)의 알바니아 민족 반군[107][108] 사이의 무장 분쟁이다.[109] 분쟁 중에는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KFOR에 UÇPMB 공격 진압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한 사례가 있었는데, 이는 쿠마노보 협정으로 인해 유고슬라비아 무장군 대부분이 진입할 수 없는 완충 지대가 설정되어 정부가 경무장 군사력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110]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는 KFOR 부대가 UÇPMB에서 발생하는 공격을 막기 위해 행동하지 않으면 새로운 전투가 발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111]

마케도니아 공화국 분란 (2001년)

마케도니아 공화국 분란은 2001년 1월 말 알바니아 민족 민족해방군 (NLA) 무장 단체가 마케도니아 공화국보안군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어 8월 오흐리드 조약으로 끝난 북마케도니아 북서부 지역의 무장 분쟁이다.[112] NLA의 목표는 마케도니아 공화국 인구의 25.2%(테토보에서는 54.7%)를 차지하는 국가의 알바니아 소수 민족에게 더 큰 권리와 자치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113][114] 또한 이 단체가 궁극적으로 알바니아계 다수 지역이 국가로부터 분리되기를 바랐다는 주장도 있었지만,[115] NLA 고위 간부층은 이를 부인했다.[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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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 금수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1991년 9월 무기 금수 조치를 부과했다.[1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국가가 교전 단체에 대한 무기 판매에 관여하거나 이를 촉진했다.[117] 2012년 칠레는 무기 판매에 관여한 9명, 그 중 2명의 퇴역 장군을 유죄로 선고했다.[118]

전쟁범죄

요약
관점

집단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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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포토차리 외곽의 발굴된 집단 무덤에서 발견된 1995년 7월 스레브레니차 집단학살 희생자의 두개골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보슈냐크인에 대한 대규모 살인은 집단학살로 확대되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1992년 12월 18일 유엔 총회는 "세르비아 및 몬테네그로군이 무력으로 더 많은 영토를 획득하려는 공격적인 행위"를 비난하고 이러한 민족 청소를 "집단학살의 한 형태"라고 규정하는 결의안 47/121을 발표했다.[82]

1993년 1월 1일 발표된 보고서에서 헬싱키 워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무슬림과, 그보다 덜하지만 크로아티아 인구에 대한 폭력의 정도와 민족적, 종교적 노선을 따른 선택적인 특성은 집단학살적 성격의 범죄를 시사한다"고 경고한 최초의 시민권 단체 중 하나이다.[119]

1994년 2월 8일 크로아티아 주재 미국 대사 피터 W. 갈브레이스백악관에 보낸 전보에는 집단학살이 일어나고 있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이 전보는 카라지치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저지르는 사라예보에 대한 "지속적이고 무차별적인 포격과 총격", 북부 보스니아에서 소수 민족을 "강제 이주시키려는 시도"로 괴롭히는 행위, 구금자를 "전선에서 위험한 작업에 동원"하는 행위를 집단학살이 저질러지고 있다는 증거로 들었다.[120] 2005년 미국 의회는 "세르비아의 침략 및 민족 청소 정책이 집단학살을 정의하는 용어를 충족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121]

국제사법재판소에서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를 상대로 1993년에 집단학살 혐의로 소송을 제기한 후 재판이 진행되었다. 2007년 2월 26일 ICJ 판결은 전쟁의 성격이 국제적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결정했지만, 스레브레니차에서 스릅스카 공화국 군대가 저지른 집단학살에 대한 세르비아의 직접적인 책임은 면제했다. 그러나 ICJ는 세르비아가 스레브레니차에서 세르브 군대에 의해 저질러진 집단학살을 막지 못했고, 책임자들을 처벌하고 재판에 회부하지 못했다고 결론 내렸다.[122]

전쟁 범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여러 지역, 특히 비옐리나, 사라예보, 프리예도르, 즈보르니크, 비셰그라드포차에서 다른 세르브 군대가 동시에 저질렀다. 그러나 판사는 보스니아 무슬림을 파괴하려는 구체적인 의도(돌루스 스페키알리스)를 가진 집단학살 기준이 1995년 스레브레니차에서만 충족되었다고 판결했다.[122] 법원은 스레브레니차 밖에서 1992년~1995년 전쟁 중에 저질러진 다른 범죄는 국제법에 따라 인도에 반한 죄에 해당할 수 있지만, 이러한 행위 자체가 집단학살을 구성하지는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123]

스레브레니차 집단학살의 범죄는 ICTY에서 여러 차례 유죄 판결로 확인되었으며, 특히 보스니아 세르브인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의 유죄 판결이 가장 주목할 만하다.[124]

민족 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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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전쟁 중 공화국별 총인구 대비 난민 및 국내 실향민 비율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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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바냐루카 근처 만야차 수용소 수감자

민족 청소는 크로아티아, 코소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쟁에서 흔한 현상이었다. 이는 원치 않는 민족 집단에 대한 협박, 강제 추방, 살해뿐만 아니라 해당 민족 집단의 예배 장소, 묘지, 문화 및 역사적 건물의 파괴를 포함하여 특정 지역의 인구 구성을 다른 민족 집단에게 유리하게 변경하여 다수를 차지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영토 민족주의영토적 열망의 예시는 당시 민족국가의 목표로 자리잡았다.[125] 오마르스카트르노폴레와 같은 구금 캠프도 정부의 전반적인 민족 청소 전략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지정되었다.[126]

수많은 ICTY 판결 및 기소에 따르면, 세르브인[127][128][129] 및 크로아트인[130] 군대는 정치 지도부가 민족적으로 순수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계획한 영토의 민족 청소를 수행했다 (세르브인의 스릅스카 공화국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크로아트인의 헤르체그보스니아).

ICTY에 따르면, SAO 크라이나의 세르브 군대는 1991년~1992년에 최소 8만~10만 명의 크로아트인과 다른 비세르브인 민간인을 추방했다.[131] 추방된 크로아트인 및 기타 비세르브인의 총 수는 17만 명 (ICTY)에서[132] 25만 명 (휴먼 라이츠 워치)에 이른다.[133] 세르브인이 점령한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내 크로아트인의 수는 1991년 203,656명(인구의 37%)에서[134] 1995년 초 4,000명으로 감소했다.[135] 또한 1999년 코소보에서 최소 70만 명에서 최대 86만 3천 명의 알바니아인이 강제 추방되었다.[136][137] 1999년 6월까지 코소보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실향민이 되었다.[138] 또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수십만 명의 무슬림이 세르브군의 협박으로 강제로 집에서 쫓겨났다.[139] 한 추산에 따르면, 세르브군은 자신이 통제하는 보스니아 지역에서 최소 70만 명의 보스니아 무슬림을 추방했다.[140] 1994년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크로아티아군도 동부 및 서부 슬라보니아와 크라이나 지역 일부에서 세르브인에 대한 민족 청소에 가담했지만, 더 제한된 규모와 더 적은 수로 이루어졌다.[141]

민족 청소의 생존자들은 이 작전의 결과로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입었다.[142]

전시 성폭력 및 강간

전시 강간은 목표 민족 집단을 추방하기 위한 민족 청소의 일환으로 공식적인 명령에 따라 일어났다.[143] 트레슈녜브카 여성 단체에 따르면, 35,000명 이상의 여성과 아동이 세르브인이 운영하는 "강간 캠프"에 억류되었다.[144][145][146] 드라고류브 쿠나라츠, 라도미르 코바치, 조란 부코비치포차 학살 중에 저지른 강간, 고문, 노예화에 대해 인도에 반한 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147]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강간의 규모에 대한 증거는 ICTY가 이러한 학대에 공개적으로 대처하도록 촉구했다.[148] 보스니아 전쟁 (1992년~1995년)과 코소보 전쟁 (1998년~1999년) 동안 세르비아 정규군 및 비정규군이 저지른 성폭력 보고서는 "특히 위협적"이라고 묘사되었다.[144] NATO 주도 코소보군은 세르브인과 코소보 해방군 구성원의 폭력으로 알바니아인, 롬인, 세르비아인 여성이 강간당한 사례를 기록했다.[149]

다른 추정치에 따르면, 보스니아 전쟁 동안 2만에서 5만 명 사이의 여성, 주로 보슈냐크인 여성이 강간당했다.[150][151] 같은 민족 집단 구성원 간의 강간 및 성폭행 보고는 거의 없다.[152]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의 전시 강간은 종종 인도에 반한 죄로 규정되어 왔다. 세르브 군대가 저지른 강간은 희생자와 그들 공동체 사이에 존재했던 문화적, 사회적 유대를 파괴하는 역할을 했다.[153] 세르비아 정책은 민족 청소의 시도로 세르비아 병사들에게 보슈냐크 여성이 임신할 때까지 반복적으로 강간하도록 촉구했다고 알려져 있다. 세르비아 병사는 반복적인 강간을 통해 보슈냐크 여성에게 세르비아 아이를 낳도록 강요하기를 바랐다.[154] 종종 보슈냐크 여성은 장기간 감금되어 있다가 강간으로 임신한 아이의 출산 직전에 풀려났다. 보슈냐크 여성에 대한 체계적인 강간은 강간 피해자의 초기 이주보다 더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강간의 트라우마로 인한 스트레스는 실향민이 흔히 겪는 생식 건강 관리 부족과 결합되어 피해 여성들에게 심각한 건강 위험을 초래했다.[155]

코소보 전쟁 동안 수천 명의 알바니아계 코소보 여성과 소녀가 성폭력의 희생자가 되었다. 전시 강간은 전쟁 무기로 사용되었으며, 체계적인 민족 청소의 도구로도 사용되었다. 강간은 민간인을 공포에 떨게 하고, 가족에게 돈을 강탈하며, 사람들을 집에서 도피하도록 강요하는 데 사용되었다. 휴먼 라이츠 워치 그룹의 2000년 보고서에 따르면 코소보 전쟁에서의 강간은 일반적으로 여성의 집에서의 강간, 피난 중 강간, 구금 중 강간의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156][157] 가해자의 대부분은 세르비아 준군사조직이었지만, 세르비아 특수 경찰이나 유고슬라비아군 병사도 포함되었다. 휴먼 라이츠 워치가 문서화한 거의 모든 성폭행은 최소 두 명의 가해자가 연루된 집단 강간이다.[156][157] 전쟁이 끝난 이후 알바니아인 민족의 세르비아인, 알바니아인, 롬인 여성에 대한 강간(때로는 코소보 해방군 (KLA) 구성원의 강간)이 문서화되었지만, 비슷한 규모로 발생하지는 않았다.[156][157] 강간은 종종 군 장교의 존재와 묵인 하에 발생했다. 군인, 경찰, 준군사조직은 종종 많은 증인이 보는 앞에서 피해자를 강간했다.[143]

2013년 유엔 개발 계획 (UNDP)이 크로아티아에서 발표한 '크로아티아 공화국 국토 전쟁 중 성폭력 피해자수 및 최적의 보상 및 지원 형태 평가' 보고서는 양측의 강간 및 기타 형태의 성적 폭행 피해자(남성 및 여성) 수를 약 1,470명에서 2,205명 또는 1,501명에서 2,437명으로 추정했다.[158] 대부분의 피해자는 세르브인에게 폭행당한 비세르브인이다.[158] 지역별로는 동슬라보니아에서 가장 많은 강간 및 성폭력 행위가 발생했으며, 약 380명에서 570명의 피해자가 있었다.[158] UNDP 보고서에 따르면 세르브인 구금 캠프 및 교도소(세르비아 본토 포함)에 수감된 동안 300명에서 600명의 남성(전체 수감자의 4.4~6.6%)과 279명에서 466명의 여성(전체 수감자의 30~50%)이 다양한 형태의 성적 학대를 당했다.[158] 1991년부터 1995년까지 세르브인이 점령한 지역 외부에서 412명에서 611명의 크로아트 여성이 강간당했다.[158] 크로아트군도 플래시 작전폭풍 작전 중에 세르브인 여성에 대한 강간 및 성폭력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약 94명에서 140명의 피해자가 있다.[158] 세르브인 수감자에 대한 성적 학대는 크로아트인이 운영하는 로라케레스티네츠 수용소에서도 발생했다.[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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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주의적 결과 및 물질적 피해

요약
관점

사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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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미치 학살 이후 시신을 수습하는 유엔 평화유지군

일부 추정치에 따르면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사망자 수는 14만 명에 달한다.[6] 인도주의법 센터는 구 유고슬라비아 공화국 분쟁에서 최소 13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한다.[7] 민간인 사망률은 52%에서 56% 사이로, 72,716명의 민간인이 해당된다.[159] 슬로베니아의 분쟁 참여는 짧았으므로 사상자 수가 적었으며, 10일간의 분쟁에서 약 70명이 사망했다. 크로아티아 전쟁은 약 2만 2천 명의 사망자를 냈는데, 이 중 1만 5천 명은 크로아트인, 7천 명은 세르브인이다.[160]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전투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에서 97,207명에서 102,622명이 사망했으며, 이 중 64,036명은 보슈냐크인, 24,905명은 세르브인, 7,788명은 크로아트인이다.[161] 비율별로는 사망자의 65%가 보슈냐크인, 25%가 세르브인, 8%가 크로아트인이다.[162] 코소보 분쟁에서는 13,535명이 사망했으며, 이 중 10,812명은 알바니아인(80%), 2,197명은 세르브인(16%)이다.[163]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곳은 사라예보로, 포위전 중 약 1만 4천 명이 사망하여[164] 코소보 전체 전쟁의 사망자 수와 거의 같았다.

상대적 및 절대적 수치로 볼 때 보슈냐크인이 가장 큰 손실을 입었다. 보스니아에서 64,036명이 사망했는데, 이는 전체 민족 집단의 3% 이상의 사망률을 차지한다.[161] 이 중 33,070명의 보슈냐크인(52%)은 민간인이고 30,966명(48%)은 군인이다.[165] 스레브레니차 집단학살에서 최악의 상황을 겪었는데, 1995년 7월 보슈냐크인 남성(연령이나 민간인 신분과 무관하게)의 사망률이 33%에 달했다.[166] 보스니아 전쟁 중 전체 민간인 사망자 중 보슈냐크인의 비율은 약 83%이며, 동보스니아에서는 거의 95%에 달했다.[167]

크로아티아 전쟁 중 크로아티아 측 사망자의 43.4%가 민간인이었다.[168]

국내실향민 및 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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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보스니아 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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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알바니아계 코소보 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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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코소보 세르브인 난민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유럽 역사상 가장 큰 난민 위기 중 하나를 일으켰다.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코소보 전쟁으로 인해 약 240만 명의 난민과 추가로 2백만 명의 국내 실향민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169]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쟁은 220만 명의 난민 또는 실향민을 발생시켰으며, 이 중 절반 이상이 보슈냐크인이다.[170] 2001년까지 여전히 65만 명의 보슈냐크인 실향민이 있고, 20만 명은 영구적으로 나라를 떠났다.[170]

코소보 전쟁은 세르비아군에 추방되거나 전투 전선에서 도피한 862,979명의 알바니아인 난민을 발생시켰다.[171] 또한 50만에서 60만 명의 국내 실향민이 발생했는데,[172] 이는 OSCE에 따르면 1999년 6월까지 코소보의 모든 알바니아인의 거의 90%가 집에서 쫓겨났다는 것을 의미한다.[173] 전쟁이 끝난 후 알바니아인은 돌아왔지만, 20만 명 이상의 세르브인, 롬인 및 기타 비알바니아인이 코소보를 떠났다. 2000년 말 기준 세르비아는 코소보, 크로아티아, 보스니아에서 온 70만 명의 세르브인 난민 또는 국내 실향민을 수용했다.[174]

비호권의 관점에서 볼 때, 크로아티아가 위기의 가장 큰 부담을 졌다. 일부 출처에 따르면, 1992년에 크로아티아는 거의 75만 명의 난민 또는 국내 실향민을 수용했으며 이는 인구 470만 명의 거의 16%에 해당하는 비율이다. 이 수치에는 42만에서 45만 명의 보스니아 난민, 세르비아에서 온 3만 5천 명의 난민(주로 보이보디나와 코소보 출신)이 포함되었고, 크로아티아 자체의 다른 지역에서 온 26만 5천 명이 추가로 국내 실향민이 되었다. 이는 독일이 1천만 명의 실향민을 수용하거나 프랑스가 8백만 명의 실향민을 수용하는 것과 맞먹는 수치이다.[175]

유엔 난민 기구(UNHCR)의 공식 데이터에 따르면 크로아티아는 1993년에 287,000명의 난민과 344,000명의 국내 실향민을 수용했으며, 이는 인구 천 명당 64.7명의 난민 비율을 나타낸다.[176] 1992년 보고서에서 UNHCR은 크로아티아를 가장 많은 난민 부담을 지고 있는 50개국 목록에서 7위에 올렸는데, 이는 316,000명의 난민을 등록했으며 전체 인구 대비 15:1의 비율이다.[177] 국내 실향민을 포함하여 크로아티아는 1992년에 최소 648,000명의 주거가 필요한 사람을 수용했다.[178] 이에 비해 마케도니아는 1999년에 인구 천 명당 10.5명의 난민을 수용했다.[179]

슬로베니아는 1993년에 45,000명의 난민을 수용했으며, 이는 인구 1,000명당 22.7명의 난민 비율을 나타낸다.[180]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1993년에 479,111명의 난민을 수용했으며, 이는 인구 1,000명당 45.5명의 난민 비율을 나타낸다. 1998년에는 이 수치가 502,037명(인구 1,000명당 47.7명)으로 증가했다. 2000년에는 난민 수가 484,391명으로 감소했지만, 국내 실향민 수가 267,500명으로 증가하여 총 751,891명의 실향민이 주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181]

자세한 정보 국가, 지역, 알바니아인 ...

물질적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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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 건물에 대한 전쟁 피해

분쟁으로 인한 물질적, 경제적 피해는 엄청났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전쟁 전 GDP가 80억~90억 달러였다. 정부는 총 전쟁 피해액을 500억~700억 달러로 추정했다. 또한 전쟁 후 GDP가 75% 감소했다고 기록했다.[189] 국내 주택의 60%가 손상되거나 파괴되어 모든 난민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데 문제가 발생했다.[190] 또한 보스니아는 유럽에서 가장 지뢰에 오염된 국가가 되었다. 영토의 1820 km2가 이러한 폭발물로 오염되었으며, 이는 육지 표면의 3.6%에 해당한다. 3백만에서 6백만 개의 지뢰가 보스니아 전역에 흩어져 있다. 5천 명이 지뢰로 사망했으며, 이 중 1,520명은 전쟁 후에 사망했다.[191]

1999년 크로아티아 의회는 전쟁 피해액을 370억 달러로 추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192] 정부는 1991년에서 1993년 4월 사이에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과 JNA 군대의 포격으로 크로아티아의 총 21만 채의 건물(학교, 병원, 난민 수용소 포함)이 손상되거나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한다. 포격의 영향을 받은 도시로는 카를로바츠, 고스피치, 오굴린, 자다르, 비오그라드 등이 있다.[193] 또한 크로아티아 정부는 1992년 말까지 크로아트계 세르브인 소유의 건물 7,489채가 폭발물, 방화 또는 기타 고의적인 수단으로 손상되거나 파괴되었음을 인정했다. 1993년 1월부터 3월까지 또 다른 220채의 건물도 손상되거나 파괴되었다. 이러한 행위에 대해 126명의 크로아트인에 대한 형사 고발이 이루어졌다.[194]

FR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제재유고슬라비아 디나르의 3억 퍼센트에 달하는 초인플레이션을 야기했다. 1995년까지 거의 100만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고 국내총생산은 1989년 이후 55% 감소했다.[195] 1999년 NATO의 세르비아 폭격은 추가적인 피해를 초래했다. 가장 심각한 피해 중 하나는 판체보 석유화학 공장 폭격으로, 8만 톤의 불타는 연료가 환경으로 방출되었다.[196] 이 폭격 중 약 31,000발의 열화 우라늄 탄약이 사용되었다.[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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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전쟁 범죄 재판: ICTY/IRM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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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전쟁 중 범죄로 ICTY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 중 일부의 모습. 왼쪽부터 라도반 카라지치, 라트코 믈라디치, 밀란 루키치, 슬로보단 프랄랴크이다.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ICTY)는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 저질러진 심각한 범죄를 기소하고 가해자를 재판하기 위해 설립된 유엔 기관이다. 이 재판소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애드혹 법원이다. 가장 유명한 재판 중 하나는 전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재판으로 2002년에 코소보,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전쟁에서 저질러진 인도에 반한 죄, 전쟁범죄, 집단학살 혐의로 66개 혐의로 기소되었다.[198] 밀로셰비치의 재판은 2006년 사망하기 전에 판결이 내려지지 않아 미결로 종료되었다.[19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학자는 ICTY의 재판이 "밀로셰비치의 리더십을 비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200]

ICTY와 그 후계 기관인 국제형사재판소 잔여업무처리기구(IRMCT)의 여러 재판으로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스레브레니차 집단학살을 확인한 첫 주목할 만한 판결은 세르브인 장군 라디슬라브 크르스티치에 대한 사건이다. 크르스티치는 2001년에 유죄 판결을 받았고, 항소심은 2004년에 판결을 확정했다.[201] 또 다른 판결은 전 보스니아 세르브인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에 대한 것으로 집단학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202] 2017년 11월 22일, 라트코 믈라디치 장군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203]

다른 중요한 유죄 판결로는 극단적 민족주의자 보이슬라브 셰셸,[204][205] 준군사 지도자 밀란 루키치,[206] 보스니아 세르비아 정치인 몸칠로 크라이슈니크,[207] 보스니아 세르브계 장군 스타니슬라브 갈리치 (사라예보 포위전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208]세르비아 내무부 차관이자 공공보안국장이었던 블라스티미르 조르제비치 (코소보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209] 전 JNA 사령관 밀레 므르크시치,[210][211]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의 전 대통령 밀란 마르티치[212]밀란 바비치가 있다.[213] 후속 국제형사재판소 잔여업무처리기구요비차 스타니시치프란코 시마토비치 (세르비아 내무부 소속 국가보안국 장교)를 유죄 판결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재판부는 이 범죄들이 무작위적이거나 무질서하게 저질러진 것이 아니라, 잘 계획되고 조율된 작전 과정에서 저질러졌으며 이는 공통된 범죄 목적의 존재를 입증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하여, 기소장에 포함된 모든 지역에서 비세르브계 민간인에 대해 저질러진 체계적인 범죄 패턴을 강조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재판부는 이 범죄가 크로아티아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넓은 지역에서 비세르브계 사람을 강제로 영구적으로 제거하려는 공통된 범죄 목적의 일부였으며, 이는 기소된 박해, 살인, 추방, 비인도적인 행위(강제 이주)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결론지었다. 또한, 이 공통된 목적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라드밀로 보그다노비치, 라도반 스토이치치 (바자), 미할 케르테스, 밀란 마르티치, 밀란 바비치, 고란 하지치, 라도반 카라지치, 라트코 믈라디치, 몸칠로 크라이슈니크, 빌랴나 플라브시치, 젤코 라주나토비치 (아르칸)를 포함한 고위 정치 및 군사 관계자에게도 공유되었다고 판단했다.[214]

또한 ICTY는 전쟁의 정치적 목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베오그라드의 세르비아 정부가 지닌 정치적 목표는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세르브인을 위한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여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추가하는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목표는 JNA 군대가 각 공화국이 효과적인 독립을 달성하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와 일치했다.[215]

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트 지도자 야드란코 프를리치와 사령관 슬로보단 프랄랴크를 포함하여[216] 여러 크로아트인, 보슈냐크인, 알바니아인도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보스니아 크로아트 군사 사령관 믈라덴 날레틸리치,[217] 전 보스니아군 사령관 엔베르 하지하사노비치,[218] 전 코소보 사령관 하라딘 발라가 있다.[219]

고토비나 외 재판에서 크로아티아 장군 안테 고토비나믈라덴 마르카치는 2012년 항소심에서 결국 무죄를 선고받았다.[220]

2019년까지 ICTY는 자체 규정에 따라[221] 세르브 관리가 크로아티아,[222]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202] 코소보[223]보이보디나에서 박해, 추방강제 이주 (인도에 반한 죄, 제5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결론지었다.[204] 또한 크로아티아,[222]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202] 및 코소보에서 살인 (인도에 반한 죄, 제5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223] 테러 (전쟁법 또는 관습 위반, 제3조)[208] 및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집단학살 (제4조)[201][202] 혐의로도 유죄 판결을 받았다. 크로아트 군대는 크로아티아에서는 무죄로 판명되었으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추방, 기타 비인도적인 행위 (강제 이주), 살인 및 박해 (인도에 반한 죄, 제5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216] 보슈냐크 군대는 비인도적 대우 (제네바 협약 중대한 위반, 제2조), 살인, 잔인한 대우 (전쟁법 또는 관습 위반, 제3조) 혐의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224] 한 알바니아 관리도 코소보에서 고문, 잔인한 대우, 살인 (전쟁법 또는 관습 위반, 제3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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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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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 밀매

전투가 끝난 후 수백만 정의 무기가 민간인에게 남아있었는데, 이는 폭력 사태가 다시 발생할 경우를 대비하여 보관되었다. 이 무기는 나중에 유럽의 무기 암시장에서 나타났다.[226]

2018년 현재 얼마나 많은 총기가 사라졌는지에 대한 정확한 공식 수치는 없다. 세르비아에서는 정부가 25만 정에서 90만 정에 이르는 다양한 종류의 총기가 유통되고 있다고 추정했다. 보스니아에서는 공개 보고서에 75만 정이라는 수치가 포함되어 있다. 2017년 말, 한 남성이 반야루카에서 예테보리를 목적지로 하는 버스에 수류탄 36개, 돌격소총 3정, 권총 7정, 지뢰 1개, 수백 발의 탄약을 담은 가방 두 개를 들고 탑승했다가 인접국 슬로베니아에서 적발되었다. 한 26세 여성은 대전차 무기 3정, 수류탄 1개를 들고 크로아티아 국경에서 적발되었다. 경찰은 79세 남성의 집에서 기관총 4정, 전투용 소총 3정, 돌격소총 3정, 다량의 폭발물을 발견했다. UNDP 관계자에 따르면 민간인이 무기를 국가에 넘기도록 설득하는 것은 복잡한 문제인데, 사람들이 정부가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범죄자가 무기를 수집한다.[227] 사라진 무기 중 일부는 2015년 11월 파리 테러에서 사용되었는데, 이 테러로 130명이 지하드주의자에게 살해되었다. 다른 무기는 2015년 예테보리 술집 총격 사건에서 사용된 돌격소총이었다.[227]

후계 국가 정부의 불법 총기 소지율 감소 노력은 재고 감소, 무기 전용 및 동남 유럽에서 설명할 수 없는 폭발 감소에 초점을 맞춘 재고 감소 지역 접근법(RASR)을 통해 조율된다. 파트너로는 유럽 연합, 미국 무기 제거 및 감축국, 미국 국방 위협 감소국(DTRA), NATO 지원 및 조달국이 있다.[228]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활동에는 미 국무부 및 국방부 관리들과 유고슬라비아 후계 국가 국방부 대표가 참석하는 연례 워크숍이 포함된다.[229]

마약 밀매

유고슬라비아에서 교전국 간의 적대 행위가 시작된 이래로 코소보 해방군세르비아 마피아마약밀매에 연루되어 왔으며, 특히 중앙 및 서유럽으로 유입되는 서아시아산 헤로인과 관련이 깊다. 1990년대 초반, 코소보 출신 알바니아인 2천 명이 무기 및 마약 밀수 혐의로 스위스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전쟁 기간 인터폴과 지역 사법 기관이 총 수 톤의 헤로인이 압수했다. 또한 불법 마약 밀수 작전은 동유럽에서 활동하는 범죄 조직이 저지르는 은행 강도 및 갈취를 포함하여 서유럽 전역에서 추가적인 범죄로 이어졌다. 서유럽에서 헤로인 소비가 심화되면서 특히 스위스에서 공개 마약 시장이 확대되었다. 보스니아 범죄 조직은 수익성이 좋은 코카인 거래에 진입함으로써 전 세계 마약 밀매에 계속해서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230][231][232]

자유 무역

2006년 중앙유럽 자유 무역 협정 (CEFTA)은 이전 유고슬라비아 공화국 대부분을 포함하도록 확대되었으며, 이는 정치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경제 협력이 여전히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CEFTA는 2007년 말에 완전히 발효되었다.[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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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요약
관점

1990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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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2월 두브로브니크 포위전 중 벽에 새로 붙은 사망 통보를 보고 있는 사람들
  • 6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9월에는 북마케도니아가 독립한다. 슬로베니아 전쟁은 10일간 지속되며 수십 명의 사망자를 낸다. 유고슬라비아군은 유엔의 개입으로 슬로베니아에서 철수하지만, 크로아티아의 세르브 반군을 지원한다.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이 크로아티아에서 시작된다. 크로아티아의 세르브 지역은 독립을 선언하지만 베오그라드만이 이를 인정한다.
  • 부코바르는 폭격과 포격으로 황폐화되고, 두브로브니크, 카를로바츠, 오시예크와 같은 다른 도시도 광범위한 피해를 입는다.[234] 전쟁 지역에서 온 난민이 크로아티아를 압도하지만, 유럽은 난민 수용에 더디다.
  • 크로아티아에서 약 25만 명의 크로아트인과 다른 비세르브인이 집에서 쫓겨나거나 폭력을 피해 도피했다.[235]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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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사라예보 포위전의 혹독한 겨울에 땔감을 모으는 포위된 주민.
  • 밴스 계획이 서명되어 세르브인을 위한 4개의 유엔 보호군 구역이 만들어지고 크로아티아의 대규모 전투가 종식된다.
  •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언한다. 보스니아 전쟁이 발발하며 보스니아 세르브 군사 지도부, 특히 라트코 믈라디치대세르비아[236] 또는 잔존 유고슬라비아를 목표로 가능한 한 많은 보스니아를 정복하려는 비전을 통해 새로운 독립 세르비아 국가인 스릅스카 공화국을 건설하려 한다.[237][238][239]
  •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이 선포되며, 남아있는 두 공화국인 세르비아몬테네그로로 구성된다.
  • 유엔은 크로아티아의 미승인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과 보스니아의 스릅스카 공화국에 대한 지원으로 인해 FR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제재를 부과한다.[240] 1992년 5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가 유엔 회원국이 된다. FR 유고슬라비아는 SFRY의 유일한 합법적 상속자라고 주장하지만 다른 공화국은 이에 이의를 제기한다. 유엔 특사는 유고슬라비아가 '각 구성 공화국들로 해체되었다'는 데 동의한다.
  • 유고슬라비아군은 보스니아에서 철수하지만, 무기는 스릅스카 공화국군에게 남겨두고 이 군은 즈보르니크, 코토르 바로시, 프리예도르, 포차, 비셰그라드, 도보이와 같이 무장이 약한 보스니아 도시를 공격한다. 프리예도르 민족 청소사라예보 포위전이 시작된다. 수십만 명의 비세르비아 난민이 도피한다.
  • 보슈냐크-크로아트 갈등이 보스니아에서 시작된다.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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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글라모치 바바라 사격장에서 열린 3일간의 훈련 중 사격 진지로 이동하는 두 대의 크로아티아 방위평의회 (HVO) T-55 주력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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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차리에 있는 스레브레니차 집단학살 기념비의 돌.
  • 비하치 지역에서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를 지지하는 보스니아 정부군과 피크레트 압디치를 지지하는 보슈냐크인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며, 후자는 세르브인들의 지원을 받는다.
  • 현재 고립된 FR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제재로 인해 유고슬라비아 디나르의 초인플레이션이 3억 퍼센트에 달한다.[195]
  • 아흐미치 학살: 크로아트 군대가 100명이 넘는 보스니아 무슬림을 살해한다.
  • 모스타르 전투. 유네스코 세계유산 모스타르의 1566년에 건설된 스타리 모스트 (옛 다리)가 크로아티아 HVO 군대의 공격으로 파괴되었다.[241] 이 다리는 2003년에 재건되었다.
  • ARBiH헤르체고비나HVO에 대해 네레트바 '93 작전을 시작하여 교착 상태로 끝난다.

1994년

1995년

1996년

  • FR 유고슬라비아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승인한다.
  • 코소보에서 알바니아 반군과 FR 유고슬라비아 당국 사이에 전투가 발발한다.
  • 지방 선거에서 부정 선거 의혹이 제기된 후, 수만 명의 세르브인이 밀로셰비치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를 3개월간 벌인다.[244]

1998년

  • 동슬라보니아는 점진적인 3년 간의 권한 이양 후 크로아티아에 평화롭게 재통합되었다.
  • 코소보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알바니아인과 국가 사이에 전투가 점차 확대된다.

1999년

  • 라차크 학살, 랑부예 회담 실패. NATO는 코소보에서 군사 작전을 시작하고 연합군 작전으로 FR 유고슬라비아를 폭격한다.[245]
  • 밀로셰비치가 협정에 서명한 후 코소보의 통제권은 유엔에 이양되지만, 여전히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일부로 남아있다.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코소보에서 전쟁에서 패배한 후, 수많은 세르브인이 이 지역을 떠나 잔여 세르비아로 피난한다. 1999년 세르비아는 약 70만 명의 세르브인 난민 또는 국내 실향민을 수용했다.[174]
  • 코소보 외곽의 알바니아인 거주 지역에서 알바니아인과 유고슬라비아 보안군 사이에 새로운 전투가 발발하며, 세 개의 지방 자치 단체를 코소보에 편입하려는 의도(프레셰보, 부야노바츠, 메드베자)가 있다.
  • 프라뇨 투지만 사망. 직후 그의 정당은 선거에서 패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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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NATO의 유고슬라비아 공습 중 손상된 베오그라드 베오그라드 군사 참모 본부 건물

2000년

  •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실각.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가 유고슬라비아의 새 대통령이 된다. 밀로셰비치가 축출되고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FR 유고슬라비아는 서방과의 관계를 회복한다. 정치 및 경제 제재는 완전히 중단되고, FRY는 많은 정치 및 경제 조직에 복귀하며, 다른 협력 노력의 후보가 된다.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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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주

  1. 공식적인 선전포고는 없었다. 전쟁의 첫 무력 충돌은 1991년 3월 1일 파크라츠 충돌이었고,[1] 이어서 1991년 3월 31일 플리트비체 호수 사건에서 첫 사망자가 발생했다.[2] 마지막 주요 전투 작전은 1995년 8월 5일~8일 폭풍 작전이다.[3] 공식적으로는 1995년 11월 12일 에르두트 협정이 체결되면서 적대 행위가 중단되었다.[4]
  2. 일부 역사학자는 1990년대의 충돌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코소보로만 한정한다.[9] 다른 역사학자는 프레셰보 계곡 분란2001년 마케도니아 분란도 포함한다.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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