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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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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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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회화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를 비롯한 후대 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베네치아 화파의 주요 예술가로는 조반니 벨리니 (1430–1516 경)와 그의 형제 젠틸레 벨리니 (1429–1507 경)으로 시작하여, 조르조네 (c. 1477–1510), 티치아노 (c. 1489–1576), 틴토레토 (1518–1594), 파올로 베로네세 (1528–1588)와 야코포 바사노 (1510–1592) 및 그의 아들들이 있었다. 선보다 색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평가받는[1] 베네치아 화파의 전통은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에서 유행했던 매너리즘과 대조를 이루었다. 베네치아 양식은 이후 서양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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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 세례 요한의 머리를 가진 살로메 c. 1515; 이 종교 작품은 티치아노가 개발한 베네치아 장르인 미인의 이상적인 초상화 역할도 하며, 모델로 베네치아 코티즌을 자주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우연히도 베네치아 회화의 주요 단계는 세기와 상당히 잘 맞아떨어진다. 16세기의 영광은 17세기의 큰 침체로 이어졌다.[3] 18세기에는 유럽 전역에서 바로크 회화로코코로 전환되면서 베네치아 화가들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베네치아 회화 전통은 1797년 베네치아 공화국소멸로 완전히 끝났으며, 그 이후로는 다른 많은 이들이 베네치아를 그렸지만, 베네치아만의 지속적인 양식이나 전통은 없었다.[4]

비록 공화국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장기적인 쇠퇴가 1500년 이전에 시작되었지만, 그 당시 베네치아는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력하며, 가장 인구가 많은 이탈리아 도시"였으며,[5] 본토에 상당한 영토를 통제했다. 이러한 내륙 영토를 테라페르마(terraferma)라고 하는데, 파도바, 베르가모, 브레시아, 베로나를 포함하여 여러 작은 도시 출신의 예술가들이 베네치아 화파에 합류하였다. 공화국의 영토는 이스트라반도, 달마티아 및 현재 크로아티아 해안을 따라 있는 섬들도 포함했으며, 이들 지역 출신의 화가들도 베네치아 화파에 들어왔다. 실제로 "16세기의 주요 베네치아 화가들은 도시 자체의 토박이가 거의 없었으며",[6] 일부는 공화국의 다른 영토나 더 멀리서 주로 활동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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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벨리니, 산 차카리아 제단화, 1505, 만년작, 베네치아 산 차카리아 성당

이탈리아의 나머지 지역은 베네치아 회화를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조르조 바사리가 1550년 미술가 열전 초판에서 베네치아 화파를 너무나 소홀히 다루었음을 알고, 1568년 2판에서는 추가 자료를 위해 베네치아를 방문할 필요가 있다고 깨달았다.[8] 반면에 외국인들의 경우에는 종종 베네치아가 처음 방문하는 대도시인 경우가 많아서, 항상 베네치아 회화를 높이 평가했다. 이탈리아에서 베네치아 보다 많은 소장작이 많은 도시는 없었다. 최고위층인 군주 수준에서는 티치아노 이후로 베네치아 예술가들이 해외 의뢰에 가장 많이 받았고, 18세기에는 최고의 화가들 대부분이 일반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상당한 기간을 해외에서 보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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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와 기법

베네치아 화가들은 유화를 사용한 최초의 이탈리아인이었으며,[10] 주로 나무 패널 대신 캔버스에 그림을 그렸다. 해양 강국인 베네치아에서는 항상 양질의 캔버스를 구할 수 있었고, 나무는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많은 베네치아 제단화 (예를 들어 벨리니의 1505년 산 차카리아 제단화, 원래는 패널에 그려짐)나 다른 큰 그림들도 캔버스 사용을 부추겼는데, 좋은 품질의 큰 패널은 비싸고 제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인들은 토착 프레스코 "회화 학교"를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종종 파도바와 1405년부터 베네치아 영토였던 베로나 출신의 화가들이 주로 활동했다(특히 파올로 베로네세가 그러했다). 베네치아에서는 그들은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금박 배경의 그림이 사라진 지 한참 후에도 산 마르코 모자이크에 금박 배경을 계속 사용했다. 또한 특이하게도 베네치아에서는 궁전 외부에 프레스코를 칠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곳에서는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빠르게 손상되어 이제 거의 희미한 흔적만 남아 있다. 궁전 내부 프레스코화는 두칼레 궁전이 거의 유일하다. 외부 프레스코의 빠르게 손상된 이유가 종종 바닷가 기후 때문이라고 하지만, 아마도 잘못된 추정일 것이다.[11] 아마도 부분적으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18세기까지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 베네치아 교회는 일관된 내부 장식 스타일이 없었으며, "그림 같은 혼란 속에 다양한 물건들의 풍요로움"을 특징으로, 많은 벽 공간은 대부분 웅장한 벽 무덤으로 채워졌다.[12]

피렌체 회화와 비교할 때, 베네치아 화가들의 그림은 많지 않은 편이다.[13] 아마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베네치아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이후로 상당히 오랫동안 이탈리아의 가장 큰 인쇄 및 출판 중심지였음에도 불구하고, 판화제작에 대한 베네치아의 기여는 예상보다 적다. 라파엘처럼 티치아노도 전문 협력자들을 사용하여 판화를 실험했지만, 그 정도는 덜했다. 조각가 아고스티노 베네치아노는 20대에 로마로 이주했으며, 줄리오 캄파뇰라와 그의 양아들 도메니코 캄파뇰라는 16세기의 주요 예술가들로, 베네치아 공화국에 남아 판화제작에 집중했으며, 주로 파도바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14] 18세기에는 상황이 달랐는데, 카날레토와 두 명의 티에폴로 모두 중요한 식각가였다. 또한,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는 로마의 풍경으로 유명했지만, 로마로 이주한 후 수십 년 동안 자신을 베네치아인으로 묘사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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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발전, 1500년까지

요약
관점

14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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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올로 베네치아노, 성모 대관이 있는 다면 제단화, 1350년 경

대략 1320년에서 1360년 사이에 활동했던 파올로 베네치아노는 "베네치아 화파의 창시자"이다. 그는 정교한 금박 나무 프레임 안에 많은 작은 장면들이 있는 "복합 제단화"를 도입한 것으로 보이며, 이 기법은 이후 두 세기 동안 교회에서 지배적인 형태로 남아있었다. 이 제단화는 산 마르코의 주 제단 뒤에 있는 거대하고 보석 박힌 매우 유명한 팔라 도로의 형태를 회화로 옮긴 것이다. 팔라도로의 에나멜 패널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제작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십자군 전쟁에서 약탈해온 것이다.[16] 사실 베네치아노는 평상시에 팔라 도로를 덮어 두는 평일 패널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기도 했다. 그의 양식은 한 세대 앞서 활동했던 조토의 영향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17]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가장 초기 형태는 1365년 파도바 출신의 구아리엔토 디 아르포두칼레 궁전프레스코를 그리는 의뢰를 받으면서 베네치아에서 처음 나타났다.

15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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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크리벨리, 성 에미디우스와 수태고지, 1486

전통적인 이탈리아-비잔틴 양식은 1400년경까지 지속되었는데, 이후로 지배적인 양식이 국제 고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자코벨로 델 피오레는 과도기적 인물이었고, 이 경향은 산 마르코를 위한 모자이크도 디자인했던 미켈레 지암보노 (c. 1400 – c. 1462)의 다소 매력적인 작품까지 이어졌다.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피사넬로는 1405-1409년의 대부분을 베네치아에서 보내며 두칼레 궁전과 다른 곳에 프레스코(지금은 소실됨)를 그렸다.[18]

15 세기 중반, 피렌체 콰트로첸토가 완전히 성숙했을 때, 베네치아는 여전히 한참 뒤처져 있었다. 아마도 베네치아에서 가장 눈에 띄는 투스카니 양식의 작품은 산 마르코의 마스콜리 예배당에 있던, 지암보노의 그림 옆에 있는 성모 마리아의 죽음 모자이크였을 것이다. 다른 도시에는 안드레아 카스타뇨의 프레스코도 있었다.[19] 비바리니와 벨리니 가문은 도시에서 15세기 화가들의 두 주요 왕조였으며, 비바리니는 나중에는 더 더 보수적이되었지만, 초기에는 남부의 양식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다.[20]

카를로 크리벨리 (c. 1430–1495)는 베네치아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대부분공화국의 영토 밖에서 활동했다. 그의 양식은 매우 개성적이고, 다소 선적이며, 다소 신경질적이었는데, 베네치아 회화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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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레 카르파초, 리알토 다리에서의 성십자가 유물 기적, c. 1496

15세기 후반부터 베네치아 회화는 (인근 파도바 출신의) 안드레아 만테냐 (1431–1506)와의 연관성과, 안토넬로 다 메시나 (c. 1430–1479)의 방문을 통해 발전했다. 다 메시나는 베네치아에 플랑드르파유화 기법을 전해줬는데, 아마도 나폴리에서의 훈련을 통해 습득했을 것으로 보인다. [22] 또 다른 외부 요인으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방문이었는데, 그는 특히 조르조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23]

조반니 벨리니는 오랜 경력을 통해 베네치아 양식을 창조하였다고 인정받는다.[2] 초기 작품들, 예를 들어 그의 작은 나무의 마돈나 (c. 1487)의 경우에는 만테냐의 소묘 위주의 접근 방식을 반영하였는데, 이후 더 부드러운 양식을 개발하여, 빛나는 색상을 사용하여 형태와 대기 중 안개를 표현하였다. 산 차카리아 제단화(1505)에서는 이러한 접근 방식을 적용하여, 높은 시점, 깔끔하고 서로 연결된 인물들의 공간 배치, 그리고 미묘한 제스처들이 모두 결합하여 고요하면서도 장엄한 이미지를 생성하였다.[24]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그는 전성기 르네상스[24]의 이상에 도달한 것으로 묘사되며, 베네치아 화파의 핵심적인 특징들을 확연히 드러낸다.

비토레 카르파초 (1465–1525/1526 경)는 벨리니의 제자였으며 독특한 양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다소 보수적이었고, 경력 후반에 발전하던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을 무시했으며, 실제로 많은 작품에서 후기 고딕 양식을 유지했다. 카르파초의 많은 대형 작품들은 베네치아의 당대 생활을 그린 장면이 많다. 젠틸레 벨리니도 그런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이 당시에는 이러한 시각들이 드물었다. 카르파초는 패널 대신 캔버스를 주로 사용한 최초의 화가 중 한 명이었다. 1500년 이후 20년 동안 본질적으로 콰트로첸토 양식을 추구한 화가들도 여럿 있었는데, 치마 다 코넬리아노 (c. 1459–c. 1517)가 가장 중요하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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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요약
관점

조르조네와 티치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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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의 초기작이자 극적인 구성의 페사로 마돈나 (1526), 풍부한 베네치아 색채를 사용하였다

조르조네티치아노는 모두 벨리니의 공방에서 견습생으로 일했다. 조르조네의 전문 분야는 아르카디아적인 전원 풍경이었는데, 그의 세 철학자가 전형적인 작품이다. 이 요소는 그의 스승 벨리니에게도 채택되어 그의 많은 마돈나 작품에서 풍경이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26] 티치아노도 전원 음악회 (1508)나 성스러운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 (1515) 같은 작품에서 이를 사용했다. 자연을 배경으로 강조하는 이러한 특징은 베네치아 화파의 주요 공헌이었다.

티치아노는 그의 길고 생산적인 생애 동안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다루며 모든 베네치아 화가들 중 가장 영향력 있고 위대한 화가로 추앙 받았다.[27][28] 그의 초기작인 페사로 마돈나 (1519–1528)는 전통적인 종교 주제에 대한 대담하고 새로운 구도를 보여준다.[29] 그는 마돈나를 중앙에서 벗어나 가파른 대각선 위에 배치했다. 색상은 그림을 활기 있게 할 뿐만 아니라 구도를 통일하는 데도 사용되었는데, 예를 들어 왼쪽의 큰 붉은 깃발로 마돈나의 붉은색과 균형을 맞추는 방식이 그러하며,[30] 이러한 능숙하고 화려한 색채 사용은 베네치아 양식의 특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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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의 누워있는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에로틱한 작품. 오른쪽의 강아지가 왼쪽의 얼굴과 균형을 이룬다.

비록 잠자는 비너스 (조르조네 사망 후 티치아노가 완성) 이후에 제작되었지만,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는 누워있는 여성 누드를 예술의 중요한 하위 장르로 확립한 공로를 인정받는다. 이러한 작품들은 신화적 주제을 대상으로, 천과 다른 질감을 풍부하게 묘사하고, 색상을 조직하여 구도를 신중하게 제어한다. 예를 들어, 이 그림에서 누드의 대각선은 앞쪽 쿠션의 붉은색과 배경에 있는 여성의 붉은 치마 사이의 방향과 일치한다.[31]

티치아노는 팔마 베키오와 같은 다른 베네치아 화가들과 함께, 상상의 아름다운 여인들의 반신상 초상화 장르를 확립했는데, 이러한 작품에 종종 다소 모호한 신화적 또는 알레고리적 제목을 붙이고 그에 맞는 속성들을 부여했다. 예술가들은 이러한 작품들의 모델이 베네치아의 유명한 고급 매춘부라는 믿음을 굳이 막지 않았으며, 때로는 실제로 그랬을 수도 있다.

티치아노는 점점 더 강렬하게 종교적 주제를 그렸고, 신화적 주제는 그의 가장 유명한 후기 작품들, 특히 스페인의 펠리페 2세를 위한 시화 시리즈를 탄생시켰다.

캔버스 유화라는 특성상 쉽게 운반될 수 있었던 이러한 그림들로 인해 티치아노는 유명해졌고, 베네치아 예술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그림들을 소유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부를 상징했으며,[32] 초상화 기술 덕분에 그는 카를 5세와 스페인의 펠리페 2세를 위해 오랫동안 일하는 등 강력하고 부유한 개인들에게 인기 있는 화가였다.[33][34]

조르조네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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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의 기적 (1548), 베네치아의 수호성인 성 마르코에 대한 틴토레토의 세 작품 중 하나

베네치아 회화계에서 티치아노의 오랜 지배는 다른 야심 찬 베네치아 화가들에게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팔마 베키오 (c. 1480–1528)는 티치아노보다 약간 나이가 많았지만, 두 위대한 혁신가의 뒤를 따르는 데 만족한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 티치아노의 작품으로 여겨졌던 많은 그림들이 사실 그의 작품일 수도 있다.[35] 그의 조카인 팔마 일 조바네 (1548/50–1628)는 티치아노의 제자로, 훨씬 후에 틴토레토와 베로네세의 양식으로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36]

로렌초 로토 (c. 1480–1556/57)는 베네치아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성숙한 경력 대부분을 테라페르마, 특히 베르가모에서 보냈다. 그는 종교적 주제와 초상화를 매우 개성적이고 때로는 별난 양식으로 그렸는데, 그의 작품들은 풍부한 색채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 주류와는 상반되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37]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c. 1485–1547)는 1511년에 로마에서 좋은 의뢰를 받아 다시는 베네치아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에서 그는 곧 미켈란젤로 역시 지배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와 길고 복잡한 관계를 시작했으며, 결국 사이가 틀어졌다. 그의 양식은 베네치아의 색채와 로마의 고전적 웅장함을 결합했으며, 베네치아 양식을 새로운 이탈리아 회화의 중심지로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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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작인 파올로 베로네세, 마리아 막달레나의 개종, c. 1548

베로나 출신의 파올로 베로네세 (1528–1588)는 1553년 베네치아에 와서 정착한 후, 두칼레 궁전의 거대한 프레스코 작업을 의뢰받았고, 남은 경력을 그곳에서 보냈다.

틴토레토는 때때로 매너리즘 예술가로 분류되기도 하지만,[39] 그는 베네치아적이고 개성적인 측면도 있었다. 그의 노예의 기적 (1548)에는 혼잡한 장면, 인물들의 뒤틀린 연결(땅에 쓰러진 단축된 노예부터 하늘에 있는 기적의 성 마르코, 터번을 쓴 회색 옷을 입은 인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극적인 몸짓과 자세 등 여러가지 매너리즘적 특징이 나타난다. 그러나 색채는 베네치아 화파의 따뜻한 붉은색, 금색, 녹색을 유지하며, 인물들은 많은 매너리즘 작품의 더 압축된 구도와는 대조적으로 실제 3차원 공간에 배열되어 있다. 또한 강렬하게 연극적이고 무대 같은 표현은 바로크의 선구자이다.[40]

야코포 바사노 (c. 1510–1592)는 베네치아에서 약 65km 떨어진 그의 고향인 바사노델그라파에서 수십 년 동안 실천한 소박한 양식을 개발했고, 네 아들들과 함께 공방을 운영했다.[41] 그의 아들들은 그가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그 양식으로 작업을 계속했다. 바로크 회화는 베네치아 시장에서 매우 느리게 인기를 얻었다.[42]

이들은 베네치아 전통의 수많은 예술가들 중 가장 뛰어난 몇 명이며, 많은 이들은 원래 외국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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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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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도 스트로치, 명성의 의인화, 아마 1635–6

17세기는 베네치아 회화의 침체기였다. 특히 팔마 조바네, 도메니코 틴토레토 와 아들, 바사노의 아들들, 파도바니노 등이 본질적으로 이전 세기의 양식으로 작업한 작품을 계속해서 내놓았던 초기 몇 십년은 심한 침체기였다. 도시에서 활동했던 가장 중요한 예술가들은 모두 이주민들이었다: 로마 출신의 도메니코 페티 (c. 1589–1623), 제노바 출신의 베르나르도 스트로치 (c. 1581–1644), 그리고 북독일 출신의 요한 리스 (c. 1590? – c. 1630). 이들 모두 로마나 제노바의 바로크 회화를 인지하고 있었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이러한 양식과 전통적인 베네치아의 회화 기법 및 색채를 반영하고 통합하는 양식을 발전시켰다.[44]

비첸차 출신의 프란체스코 마페이 (c. 1600–60)와 피렌체 출신의 세바스티아노 마초니 (1611–78)라는 두 개인 화가가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는데, 이들 모두 주로 베네치아나 테라페르마에서 비정통적이고 자유로운 바로크 양식으로 작업했으며, 둘 다 베네치아의 특징인 뛰어난 붓놀림이 두드러졌다.[45]

선도적인 나폴리 화가 루카 조르다노가 1653년과 1685년에 베네치아를 방문하여 최신 바로크 양식의 작품을 남겼고, 조반 바티스타 랑게티, 피에트로 리베리, 안토니오 몰리나리, 독일인 요한 카를 로트와 같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었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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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요약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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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티아노 리치, 바다의 비너스 승리, c.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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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날레토, 대운하 입구, 베네치아, c. 1730, 전형적인 베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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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클레오파트라의 만찬, 1743–44

17세기 말이 되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했으며, 18세기 대부분 동안 베네치아 화가들은 유럽 전역에서 놀라운 인기를 누렸다. 그 시기에 도시 자체는 쇠퇴하고 시장 규모는 크게 줄어들었고 특히 대형 작품에 대한 수요는 크게 줄었음에도 이러한 현상은 계속되었다.[47] "18세기 중반까지 베네치아 예술은 주로 수출 상품이 되었다."[48] 새로운 양식의 첫 번째 중요한 예술가는 베네치아의 이탈리아 본토 영토의 벨루노 출신인 세바스티아노 리치 (1659–1734)로, 베네치아에서 훈련을 받다가 불명예로 도시를 떠났다. 그는 1698년에 10년 동안 돌아왔고, 영국, 프랑스 등에서 시간을 보낸 후 말년에 다시 돌아왔다. 특히 베로네세의 영향을 받아 그는 가볍고 경쾌한 바로크 양식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18세기 후반의 회화를 예고했으며 젊은 베네치아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49]

조반니 안토니오 펠레그리니는 리치에게 영향을 받았고, 그의 조카 마르코 리치와 함께 작업했지만, 후기 로마 바로크에도 영향을 받았다. 그은 대부분 도시 밖에서 활동하였는데, 알프스 북쪽 여러 나라에서 일했으며, 그곳에서는 새로운 베네치아 양식이 집 장식에 큰 인기를 얻었다(실제로 베네치아 자체에서는 더 느리게 받아들여졌다). 자코포 아미고니 (a. 1685–1752)는 또 다른 궁전 장식가로, 로코코 초기 초상화로도 인기가 많았다. 그는 마드리드에서 궁정 화가로 생을 마감했다.[50] 가장 중요한 베네치아 여성 예술가인 로잘바 카리에라 (1675–1757)는 순수하게 초상화가였으며, 주로 파스텔을 사용했고, 이 중요한 18세기 형식을 위한 길을 닦은 중요한 기술 혁신가였다. 그녀는 특히 런던, 파리, 빈에서 국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51]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1696–1770)는 유럽 전역에서 수요가 많았던 마지막 위대한 베네치아 화가로, 북부 바이에른주뷔르츠부르크 공관 (1750–53)과 마드리드 왕궁에서 그의 가장 큰 프레스코 작품 두 점을 그렸다. 그는 그곳에서 1770년에 사망했다.[52]

마지막 번성기에는 지암바티스타 피토니, 카날레토, 조반 바티스타 피아체타, 프란체스코 과르디와 같은 다양한 재능을 가진 화가들이 포함되었으며,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의 여러 가족 중 가장 뛰어난 제자이자 조수였던 조반니 도메니코 티에폴로도 있었다.[53]

카날레토, 그의 제자이자 조카인 베르나르도 벨로토, 미켈레 마리에스키, 그리고 과르디는 풍경화를 전문으로 그렸는데, 두 가지 뚜렷한 유형을 그렸다. 첫째는 베두타 또는 상세하고 거의 정확한 파노라마적 풍경으로, 보통 도시 자체를 그렸으며, 많은 부유한 북유럽인들이 그랜드 투어를 하며 구입했다(베네치아에 남아있는 카날레토 작품은 거의 없다). 다른 유형은 카프리치오로서, 종종 고전 유적을 배경으로 한 환상적인 상상의 장면에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는 형태이다. 마르코 리치는 카프리치오를 그린 최초의 베네치아 화가였고, 이 형식은 과르디에 의해 최종적으로 발전했는데, 그는 "뛰어난 색조의 섬세함과 향수가 깃든 시적인 분위기"를 가진 물, 배, 땅이 있는 많은 자유로운 라군 장면을 제작했다.[54]

피에트로 롱기 (c. 1702–1785)는 베네치아 회화의 가장 중요한 풍속화가로, 경력 초기에 동시대 베네치아 생활의 작은 장면들을 전문으로 그렸으며, 대부분 온화한 풍자의 요소를 담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양식을 개척한 최초의 이탈리아 화가 중 한 명이었고, 또한 대화 그림 초상화의 초기 화가였다. 대부분의 베네치아 예술가들과 달리, 그는 생동감 넘치는 스케치들을 많이 남겼다.[55]

1793년 과르디의 사망과 곧 이어진 1797년 프랑스 혁명군에 의한 공화국의 소멸은 독특한 베네치아 양식을 사실상 종말시켰다. 이 점에서는 적어도 라이벌인 피렌체보다 오래 지속되었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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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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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 과르디, 마게라 탑이 있는 베네치아 라군 풍경, 1770년대, 21.3 cm (8.3 ″) x 41.3 cm (16.2 ″)

베네치아 화파는 이후 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후대 서양 미술의 역사는 피렌체 화파로마 르네상스 전통의 더욱 지적이고 조각적/선적인 접근 방식과, 다채로운 베네치아 화파의 더욱 관능적이고 시적이며 쾌락을 추구하는 접근 방식 사이의 대결/대화로 묘사된다.[57] 특히 스페인에 티치아노의 작품들이 전해지면서 (그는 직접 스페인에 가는 것을 신중히 피했다), 베네치아 양식은 벨라스케스를 포함한 후대 스페인 미술, 특히 초상화에 영향을 미쳤고, 루벤스를 통해 유럽의 나머지 지역으로 더욱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58]

베네치아는 방문하는 예술가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주제였다. 특히 베네치아 예술가들의 중요성이 떨어진 직후부터 외래 예술가들에게 인기가 높아졌다. 이 도시를 자주 묘사한 가장 잘 알려진 예술가들로는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클로드 모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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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 베네치아 화가 및 건축가 목록

내용주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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