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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신라의 태대각간 (595–673)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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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한국 한자: 金庾信)은 신라의 무신(武臣)이다.
진평왕 때에 처음 출사하여 선덕여왕에서 문무왕에 이르는 다섯 조정을 거치면서 신라 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하였고, 김춘추와 연계하여 그의 즉위를 돕고 나아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를 축출하는 삼한일통 전쟁을 주도하였다.
생전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는 전무후무한 최고 관등을 받고 사후에는 신하로서 왕으로 추존된 유일한 인물이며, 태종 무열왕의 즉위 및 삼한일통 전쟁에 세운 공적을 인정받아 왕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충장렬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大王, 약칭 흥무대왕)으로 추존되었다. 신라를 포함하여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성신(聖臣)·주석지신(柱石之臣) 등으로 추앙받았다.[출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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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요약
관점
출생
금관국을 세운 수로왕의 12대 손이라고 언급된다. 금관국의 마지막 왕 구형왕이 법흥왕 19년(532년) 세 명의 아들을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했으며, 그의 세 아들 중 막내인 김무력이 신라의 신주군주(新州軍主)로 진흥왕 개국(開國) 4년(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을 체포해 죽이는 공을 세웠다. 김무력의 장남이었던 아버지 김서현은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을 지냈다. 어머니 만명은 진흥왕의 아우인 숙흘종의 딸이다.
김유신열전에는 김서현이 길에서 만명을 보고 눈짓으로 꾀어서 마침내 서로 야합을 하게 되었는데, 서현이 만노군(萬奴郡)의 태수로 전출되면서 만명도 함께 데려가려 했다. 그러나 서현과 만명이 서로 야합한 것을 알게 된 숙흘종은 분노하여 딸을 별채에 가두고 사람들에게 지키게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난데없는 벼락이 쳐서 별채를 지키던 사람들이 놀라 정신없는 틈을 타서 만명은 창문으로 도망쳐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떠났다고 한다.
유신은 진평왕 건복 12년(595년)에 아버지 서현의 부임지인 만노군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그를 갖고 스무 달이 지나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서현은 경진일 밤에 형혹성과 진성 두 별이 자신에게 내려오는 꿈을, 만명은 신축일 밤에 한 어린아이가 황금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유신을 갖게 되었으며, 원래 경진일 밤에 서현이 꾼 태몽으로 얻었다 하여 이름을 경진으로 지으려던 것을, "날이나 달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어서는 안 된다"는 《예기》의 말에 따라, 경(庚)과 자획이 비슷한 '유', '진'과 발음이 비슷한 '신'을 써서 이름을 유신이라 짓게 되었다고 한다.
신라의 만노군 즉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에는 김유신과 관련된 전승을 전하는 지명이 온존해 있으며, 현지의 태령산(胎靈山)이라는 지명도 김유신이 태어난 뒤에 그의 탯줄을 묻었다는 전승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 김유신의 탄생지와 그의 태실로 전하는 곳은 모두 '진천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청년기
김유신의 유년 시절에 대한 자료는 남아 전해지지 않는다. 주보돈은 김유신이 유년기를 자신의 출생지이자 아버지 김서현이 태수를 맡고 있는 만노군에서 보냈고, 왕경으로 돌아온 뒤 15세 되던 무렵에 화랑으로서 조직을 이끌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2] 김유신이 주도한 화랑도의 정식 명칭은 용화향도(龍華香徒)라 하였는데, '용화'란 미륵신앙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며 이러한 이름에는 화랑으로서 김유신 자신(그리고 김유신 집안)이 처한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는 해석이 있다.[3]
낭비성 전투
건복 46년, 진평왕 51년(629년) 가을 8월, 왕명을 받고 고구려의 낭비성을 치게 된 아버지를 따라 종군했을 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김유신이 군중에서 갖고 있던 직책은 《삼국사기》 본기에는 부장군(副將軍), 열전에는 중당당주(中幢幢主)로 기재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40 직관지 하(下)에 중당(仲幢)이라는 부대명이 있지만, 이것이 설치된 것은 문무왕 11년(671년)의 일이다.
1차 접전에서 고구려군에 크게 패한 신라군이 사기가 꺾이고 싸울 의지마저 잃게 되자, 유신은 직접 나서서 적진을 오가며 적을 교란시키고 적군 장수의 목을 베어 가지고 돌아왔다. 이에 고취된 신라군은 다시 용기를 얻어 진격해 고구려군과 싸웠고, 성 안에 남아 있던 고구려군은 두려워한 나머지 더 이상 싸울 의지를 잃고 항복했다고 한다.
김춘추와의 만남
기록상 유신의 첫 전투로 알려진 낭비성에서의 싸움에 신라군 지휘관으로 참전했던 인물 가운데는 파진찬 김용춘도 포함되어 있었다. 용춘의 아들로서 훗날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김춘추와는 훗날 정치적 동맹자로서 굳건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들 사이의 동맹에는 양자간에 중첩적인 혼인을 통한 혈연관계 형성이 주요한 토대가 되었다. 《삼국유사》에는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때는 정월 오기일(烏忌日)[주 2], 뜰에서 춘추와 함께 축국을 하던 유신은 일부러 그의 옷고름을 밟아 터지게 하고서, 옷고름을 꿰맨다는 핑계로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누이동생 문희에게 그 옷고름을 꿰매게 하였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춘추는 자주 유신의 집을 드나들게 되었고 마침내 문희가 임신하게 되자 유신은 "혼인도 하지 않고 아이를 가진 누이를 화형에 처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게 한 뒤, 왕이 남산에 행차하는 날에 맞춰서 집 뒤뜰에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불을 질러서 연기를 피워올렸다. 남산에서 이 연기를 목격한 왕이 좌우 신료들에게 묻자, 신료들은 자신들이 들은 소문을 왕에게 아뢰었고, 마침 왕의 옆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 안색이 변한 춘추를 본 왕은 아이의 아버지가 그임을 짐작하며 얼른 가서 구해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마침내 혼인하게 되었다.
선덕여왕 인평 9년(642년) 백제는 대야성을 비롯한 신라 서쪽 40여 성(城)을 쳐서 함락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춘추의 사위였던 대야성주 김품석(金品釋) 부부가 죽자 김춘추는 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고구려에 원병 파병을 요청하러 떠났다. 고구려로 떠나기 전날, 김춘추는 김유신을 찾아와 “지금 내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려 하는데, 60일이 지나도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후 다시는 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공은 어찌하겠소?”하고 묻자, 김유신은 “그때는 내 말의 발굽이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 왕의 정원을 짓밟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맹세를 나누었다. 김춘추가 떠난 뒤 압량주(押梁州,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주변)의 군주(軍主)로 옮겨간 김유신은 김춘추가 고구려에서 억류되어 60일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결사대 3천명을 뽑아 왕에게 출병을 요청하였고 이에 선덕여왕은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로 진군을 명하였다. 유신이 병사들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고구려 남쪽 변경에 들어섰고, 신라에 간첩으로 와 있던 승려 덕창(德昌)으로부터 이 소식을 접한 고구려 조정은 전쟁 방지를 위해 김춘추를 석방했고, 김춘추는 무사히 풀려났다.
백제와의 전쟁
인평 11년(644년) 진골 귀족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인 소판(蘇判)으로 승진하였다. 가을 9월에는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왕명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 성열성(省熱城) · 동화성(同火城) 등을 포함한 7성을 점령했다. 이듬해(645년) 정월에 서라벌로 돌아와 개선 보고도 하기 전에 다시 계백이 이끈 백제군이 매리포성에 쳐들어왔다는 급보가 날아들자 여왕은 유신을 상주장군으로 삼아 막게 했다. 유신은 집에 들르지도 않고 곧바로 달려나가 백제군 2천여 명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두었고, 음력 3월에 다시 백제의 침공을 격퇴했다.
같은해(645년) 5월에는 당나라의 요청으로 고구려 원정작전을 수행하였다. 신라는 3만 명의 대 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 원정에 참여하였다. 경주에서 출발하여 상주, 문경, 이천을 거쳐 고구려 국경인 수구성까지 진출하였으나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패배하자 신라도 철수하였다. 그러나 그 틈에 백제가 신라 7개 성을 다시 빼앗았고, 김유신이 급히 돌아와 반격하였으나 재탈환에는 실패하였다. 원정에 대한 경험을 얻은 반면 양면전쟁의 약점을 인식하게 된것이다.
비담의 난
인평 14년(647년) 정월에 상대등 비담·염종 등이 '여자 임금은 능히 나라를 다스리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다.[주 3] 반란은 진압되었고 그 사이 선덕여왕이 승하하고 그 뒤를 이어 선덕여왕의 사촌인 승만공주가 왕위를 계승하여 진덕여왕이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비담의 난에 김유신이 활약했다는 언급이 본기에는 없고 김유신열전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로 인해서 김유신이 실제로 비담의 난 진압에 관여한 것이 맞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김유신열전에 실려 있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명활성에 들어간 반군과 맞서 김유신은 춘추와 함께 월성에 설치된 진영에 주둔하며 열흘 동안 반란군과 대치했다. 그러다 한밤중에 큰 별 하나가 월성에 떨어지는 것을 본 비담이 병사들에게 “별이 떨어진 곳은 반드시 피를 흘린다 하니 이는 여왕이 패하고 내가 승리할 징조다!”라고 하여 반군의 사기는 크게 치솟았다. 월성에도 이 소식이 알려져 왕이 걱정하였는데, 김유신이 나서서 "별이 떨어지는 것은 기상현상일 뿐이고 지혜와 덕으로 요사함을 눌러 이길 수 있다"고 하여 진정시킨 뒤, 몰래 사람을 시켜 허수아비를 커다란 연에 매달아 불을 붙이고 밤에 몰래 하늘로 띄워 올린 다음, 병사들에게 “어젯밤에 떨어진 별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반란군이 동요하는 사이에 유신은 명활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비담을 쳐서 9족을 모두 죽였다.
장년기
반란을 진압한 후 압량주군주로 부임한 유신은 10월에는 무산성(茂山城, 지금의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감물성(甘勿城,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잠성(桐岑城,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에 들어온 백제군을 격퇴했다.

진덕여왕 태화(太和) 원년(648년) 3월 김유신은 예전에 백제에게 빼앗긴 대야성을 되찾기 위해 진덕여왕의 허가를 받고 출전하였다. 당시 압량주 군주였던 김유신은 군무에는 뜻이 없는 듯 음주와 풍악으로 수 개월을 보냈는데 주민들이 '한번 싸워 볼 만 한데 장군이 게으르니 어찌하는가?'라고 비방하자 비로소 백성을 부릴 때가 되었다고 여기고 출동을 요청하였다. 김유신이 근처 계곡에 군사를 매복시킨 뒤 대야성 밖에 이르자 백제군이 공격해 왔다. 백제군과 한동안 맞서 싸우던 김유신은 갑자기 군사를 돌려 후퇴하였다. 이것을 본 백제군은 성 밖으로 나와 신라군을 뒤쫓았다. 이때 계곡에 숨어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백제군의 후방을 공격하자, 후퇴하던 김유신도 즉시 군사를 돌려 협공을 가해 백제군 1천여 명이 죽었다. 그리고 백제 진영과의 교섭을 통해, 전투에서 사로잡은 백제 장군 여덟 명을 돌려보내는 조건으로 앞서 대야성에서 죽은 김품석 내외의 유골을 송환받는 데 성공했다. 승세를 몰아 유신은 거듭 백제를 쳐서 악성(嶽城) 등 12성을 함락시켰으며, 2만여 명을 죽이고 9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그 공으로 김유신은 이찬(伊飡)으로 승진 한 뒤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임명되었다. 이어 김유신은 백제의 진례성 등 9개의 성을 쳐서 9천여 명을 죽이고 6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한편 이 해에 당에 사신으로 들어갔던 춘추는 당의 황제로부터 원병 파병의 약속을 얻어내고, 아들 한 명을 당의 황제 옆에 남겨두어 숙위하게 한 뒤 귀국하고 있다.
이듬해 8월, 백제의 장군인 좌평 은상(殷相)이 대군을 이끌고 석토(石吐) 등 7성을 기습해 대량의 전사자가 나고, 석토성 등 7개의 성을 백제에 빼앗기자 유신은 압량주, 상주, 신주 지역의 3군을 다섯 갈래의 길로 나누어 공격하였다. 유신은 백제의 첩자에게 거짓정보를 흘려 방심케 한 후 기습 공격하여 은상과 자견(自堅)을 비롯한 백제 장수 10명과 8,980명에 달하는 백제군을 죽이고, 달솔 정중(正仲) 등 장수 100명을 사로잡았으며 말 1만필과 갑주 1,800필을 노획한다. 서라벌로 돌아온 김유신은 진덕여왕으로부터 직접 환대를 받는 등 극진한 예우를 입었다고 한다.
노년기
김춘추의 추대와 백제 멸망

진덕여왕 8년(654년) 봄 3월에 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자 화백은 상대등이었던 알천을 추대했으나, 알천은 이를 거부하며 이찬 춘추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가 태종 무열왕이다. 이때의 유신의 정치적 영향력은 귀족 회의인 화백의 결정을 취소시키고 자신의 연척인 춘추를 왕으로 추대할 만큼 성장해 있었다.
무열왕 2년(655년) 유신은 대각간(大角干)에 임명되었다. 이 해 1월에 고구려, 백제, 말갈의 연합군이 신라 북쪽 33개의 성을 빼앗았다. 세 나라하고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김유신은 9월에 백제의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10월 무열왕의 셋째 딸이자 외조카였던 지소와 혼인했다. 이러한 신라 왕실과의 이중, 삼중의 혼맥을 통해 그는 신라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다. 그리고 그해에, 유신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좌평 임자(壬子)의 가노가 된 전(前) 부산현령(夫山縣令) 급찬 조미압을 통해 임자와 연계하는데 성공, 그로부터 백제의 내부 사정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무열왕 7년(660년) 초에 그는 상대등으로 승진했다. 이 해 6월 마침내 당 고종은 신라에 대한 원병 파병을 실행에 옮겨, 대장군 소정방 · 유백영(劉伯英)이 지휘하는 13만 수군을 신라로 보냈다. 유신은 왕명으로 태자 법민(法閔)과 장군 김진주 · 김천존 등과 함께 큰 배 1백 척을 타고 당병이 주둔하는 덕물도로 갔고, 이곳에서 당병은 뱃길, 신라군은 땅으로 7월 10일에 백제의 수도 사비성 앞에서 합류해 백제를 친다는 계획을 세웠다. 유신은 5만 병사를 이끌고 사비성으로 향하던 중, 백제의 계백이 이끄는 5천 병력과 황산 벌판에서 만나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 가까스로 소정방군과 합류해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이때 황산벌 싸움 탓에 당초 당군과 약속한 7월 10일에서 하루 늦은 것을 트집잡아 신라측 독군 김문영을 처형하려 드는 소정방에게, "그러면 우리는 백제를 쳐부수기 전에 당과 먼저 싸울 것이다!"는 태도로 맞서 끝내 소정방을 물러서게 했다. 또한 당 고종으로부터 현지에서의 일을 임의대로 처리하도록 권한을 위임받은 소정방이 유신과 김인문 · 김양도(金良圖) 세 사람을 포섭하기 위해 “지금 얻은 백제의 땅을 그대들에게 식읍으로 나눠주겠다”고 하자 유신은 "굳이 우리만 상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라는 간곡한 말로 거절한다.
당병이 백제 땅에 주둔하면서 기회를 봐서 신라를 치려고 하는 것을 파악한 그는 신라군을 백제군으로 변장시켜 당병을 치게 하자는 계획을 진언했고, 소정방은 일부 잔여 병력만을 백제의 옛 수도 사비성에 남긴 채 자신은 의자왕과 백제 신료 93인, 1만여 명을 포로로 데리고 당으로 돌아갔다. 이후 무열왕의 뒤를 이어 유신의 조카이자 처형(妻兄)인 태자 법민이 즉위하자, 유신은 그를 도와 섭정과 외교 활동을 겸하며 삼한일통 전쟁을 지속해 나갔다.
고구려의 멸망
당은 백제의 옛 수도 사비성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고구려 공격의 후방 기지로 삼는 동시에 신라를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하려 했지만, 백제 멸망 직후부터 백제 땅 전역에서 시작된 흥복운동으로 그 계획은 막혀버렸다. 백제의 옛 귀족인 귀실복신과 승려 도침이 지휘하는 백제 흥복군은 당병이 주둔하던 사비성을 포위해 궁지에 몰아넣었고, 신라군은 백제 흥복군을 진압하는 한편으로 그들의 포위망을 뚫고 고립되어 물자 보급이 끊어진 사비성의 당병에게 소금과 간장을 보내주기에 급급했다. 한편 사비성이 함락된 해 11월에는 고구려가 다시 신라를 공격해 칠중성(七重城)에서 성주 필부(匹夫)가 전사하고, 이듬해인 무열왕 8년(661년) 5월에는 고구려가 말갈의 병사들까지 동원하여 신라의 북한산성(아차산성)을 공격해 20일 동안 전투를 치르고서야 퇴각하고 있다.
9월에 신라와 당 사이의 주요 연락거점 한가운데에 위치해 백제군의 점거하에 있던 옹산성(瓮山城)이 함락되었고, 당병과의 연합작전 계획에 따라 신라군이 평양으로 향하던 도중, 평양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으로부터의 다급한 군량수송 요청이 함자도총관 유덕민을 통해 들어왔다. 적지에 들어가 군량을 수송하고 돌아와야 하는 어려운 작전에 누구도 자원하려는 자가 없는 가운데, 유신이 스스로 임무를 수행하겠다고 자청해왔다. 문무왕은 기뻐하며 곧 떠나려는 유신에게 "국경을 넘어서부터, 상벌은 마음대로 하라(出疆之後 賞罰專之可也)"는 면책특권을 주었다. 12월 10일에 유신은 군량 수송을 위해 부장군 김인문 · 김진복(金眞服) · 김양도 등과 함께 쌀 4천 섬과 조(租) 22,250섬을 당군 진영까지 수송할 수송부대를 이끌고 고구려 국경으로 들어갔다. 이때 유신의 나이는 68세였다.
문무왕 2년(662년) 정월 23일에 칠중하(七重河)에 이르러, 두려워 배에 오를 생각을 않는 장병들에게 호통을 치며 먼저 배를 타고 건넜고 이에 모든 장병들이 따라서 강을 건넜다. 유신은 고구려군이 큰길에서 지킬 것을 염려해 일부러 험하고 좁은 길을 택해 나아갔는데, 이따금 길에서 적병을 만나 싸워서 이기면서 장새(獐塞)의 험한 곳에 이르렀다. 겨울의 혹한에 사람과 말이 지치고 피곤해 쓰러지는 자가 속출하는 앞에서 유신은 웃옷을 벗고 직접 채찍을 잡고 말을 몰아 앞에서 사람들을 이끌었다고 한다. 그렇게 험한 길을 빠져나와 휘하의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구근(仇近) 등 15명을 먼저 평양에 보내어 신라군이 도착했음을 소정방에게 알렸는데, 이때 소정방은 난새와 송아지를 종이에 그려 보냈다. 원효(元曉)의 풀이로 이것이 신라군에게 "어서 군사를 돌리라(速還)"는 암호문임이 확인되었고, 양오(楊隩)에 진을 치고 있던 유신은 김인문과 김양도, 아들 김군승을 보내 당의 진영에 군량을 보내고, 소정방은 군량을 받자마자 바로 퇴각했다.
유신의 명령으로 당의 진영에 갔던 양도 등은 따로 군사 8백 명과 함께 뱃길로 귀국했는데, 유신은 퇴각하는 길에 고구려군의 기습에 대비해 북과 북채를 모든 소의 허리와 꼬리에 매달아 뛸 때마다 소리를 내게 하고, 또 땔나무를 쌓아 놓고 태워서 연기와 불이 끊이지 않게 해 놓는 등 교란 작전을 펼치면서 밤중에 몰래 표하(瓢河, 임진강)까지 이르렀다. 강을 건너기에 이르러 유신은 나중에 건너는 놈은 베겠다는 명을 내렸고, 군사들이 다투어 강을 건너는데 반쯤 건너자 고구려 병사들이 추격해 와서 미처 건너지 못한 신라 병사들을 잡아 죽였다. 유신은 다음날 고구려 병사를 뒤쫓아 수만 명을 죽였다. 나루를 건너 강가에서 쉬는데 고구려군이 다시 추격해오자, 유신은 쇠뇌를 이용한 집단사격으로 고구려군을 역습해 패퇴시켰으며, 고구려의 소형 아달혜를 사로잡고 고구려군 1만여 명을 목베는 전과를 올렸다. 서울로 돌아와 공을 논하는 자리에서, 유신은 먼저 선발대로 뽑아 보냈던 열기와 구근에게 미리 급찬(級飡)을 준 뒤, 문무왕에게 그들의 공로를 논하며 급찬보다 높은 사찬(沙飡)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한편 백제 흥복군 내부에서는 분열이 일어나, 도침이 복신에게 살해당하고 복신이 전권을 차지했으나 다시 부여풍(扶餘豊)에게 살해당하는 등 혼란이 거듭되는 가운데, 부여풍은 재차 고구려와 왜에 원병을 청해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663년, 당으로부터 증원된 손인사 등이 이끄는 수군과, 문무왕과 유신 등의 네 장수들이 이끄는 육군이 서로 육지와 바다에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쳐서 이기고 마침내 백제 흥복군의 본거지 주류성(周留城)을 함락시켰다. 그 공으로 유신은 겨울 11월 20일에 토지 500결을 상으로 받았다.
665년에 당 고종이 보낸 사신 양동벽(梁冬碧) · 임지고(任智高) 등이 유신을 문안하여, 그에게 봉상정경(奉常正卿) · 평양군개국공(平壤郡開國公) 식읍(食邑) 2천 호라는 당의 관직을 주었다. 666년에는 맏아들인 대아찬 김삼광이 당 고종의 요청으로 당에 불려가, 좌무위익부중랑장(左武衛翊府中郞將)으로서 고종을 숙위하게 되었다. 667년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병으로 싸움터에 나가지는 못하였다. 대신에 문무왕이 원정을 나가고 유신은 내정을 맡아보았다. 668년 대총관(大摠管)에 임명되었으나, 늙고 쇠약해진 데다 병까지 들어 직접 원정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서라벌에 남았으며, 대신 유신의 조카이자 처형인 김인문과 유신의 아우인 김흠순 등이 대신 주장(主將)으로 나섰다. 그리고 9월 26일에 나·당 연합군은 마침내 평양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했다. 한편 이 날, 왜(倭)에서는 오키미 덴지(大王天智)의 근신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가 신라의 사신인 사훼급찬(沙喙級湌) 김동엄(金東嚴) 등에게 김유신에게 선물할 배 한 척을 호벤(法弁)·신비쓰(秦筆) 두 사문을 시켜 전달하고, 사흘 뒤에는 문무왕에게도 또 수어조선(輸御調船) 한 척을 선물하였다.[4]
회군하는 길에 남천주에 들른 문무왕은 예전 유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조정에 봉사하며 세운 공과 유신이 그간 이룬 일들을 신료들 앞에서 술회하며 유신에게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의 관등과 식읍 5백 호를 내리고, 수레와 지팡이를 내림과 동시에 대궐에서 몸을 굽히지 않는 것이 허락되었으며, 유신의 요좌들에게도 모두 1등급씩 위계를 올려주고 있다. 당 고종 또한 김유신에게 조서(詔書)를 주었는데, 그 실물은 유신의 5세손 때까지 보전되다 실전되었다고 한다.[5] 이후 병으로 직접 정치나 군사활동에는 참여하지는 못하고, 다만 왕실과 군사의 원로로서 왕에게 여러 차례 전략 수립에 대해 자문을 맡았다.
나당전쟁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은 그 옛 땅에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직접 통치하려는 야욕을 드러내는 것은 물론, 신라에 대해서도 문무왕에게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이란 관직을 내리는 등 신라를 당의 일개 기미주로 취급하며,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 했다. 이미 당은 백제 흥복운동이 진압된 직후인 664년에 백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扶餘隆)을 웅진도독으로 파견하고 문무왕을 호출하여 취리산에서 회맹(조약)을 체결하게 했는데, 이는 당의 괴뢰정권으로서 백제를 부활시켜 신라와 맞서게 하려는 것으로 신라에 의한 평양-패강 이남의 지배를 인정한다는 당초의 약속과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또한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이미 예전에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아 차지하고 있던 비열홀을 신라로부터 강제로 빼앗아 고구려에 주는 등, 당은 서서히 신라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고 있었다.
최종적으로는 당이 백제와 고구려 다음으로 신라를 노릴 것이라는 사실은 김유신에 의해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신라는 한반도에서 당병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고,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여 백제 땅에 주둔하던 당병을 습격해 그들을 몰아내고 백제 지역에 대한 지배 체제를 다져 나갔다. 그러나 고구려군을 지원하던 신라군은 672년 말갈과 연합해 석문(石文) 벌판에 진을 치고 있던 당군과의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신라의 여러 장수들이 전사한 이 전투에 유신의 아들로서 신라군 비장(裨將)의 자격으로 참전했던 김원술이 살아오자 유신은 원술에게 비장으로서 다른 장수들을 따라 죽지 못하고 목숨을 부지한 것을 '왕명을 무시하고 가풍(家風)을 더럽힌 죄'를 물어 처형할 것을 청했다. 문무왕은 이를 거절하고 원술을 사면했으나, 이후 원술은 집에도 돌아가지 못한 채 산 속에 근신하여 이후 유신이 숨을 거둘 때까지 숨어 살았다.
한편 석문에서의 패배 이후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성 위주의 방어전으로 전술을 변경하자는 김유신의 조언에 따라, 신라는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는 등 각지에 방어 거점을 구축하고, 앞서 포로로 잡은 웅진도독부 소속 당병들을 9월에 돌려 보내고 사죄문의 형식을 담은 표문을 당에 바쳤다.
사망
문무왕 13년(673년) 봄 정월에 황룡사와 재성 사이에 큰 별이 떨어지고 지진이 일어나 조정과 민간이 어수선해지자, 유신은 왕을 알현하여 이번의 재앙은 국가가 아닌 자신에게 일어날 일에 대한 흉조이니 신경쓸 것 없다며 위로했다. 이후 병들어 누운 자신을 문병하러 방문한 문무왕에게, "처음부터 못하는 이야 없진 않겠지만, 끝까지 잘 맺는 이는 거의 없다네"(靡不有初 鮮克有終)[6]라는 《시경》(詩經)의 말을 인용하며 신하로서 왕에게 당부하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7월 1일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향년 79세였다.
《삼국사기》열전에는 김유신의 죽음과 관련해 이런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김유신이 병을 얻기 한 달 전, 군복을 입고 무기를 든 수십 명이 그의 집에서 울면서 나오더니 곧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 목격되었는데, 유신은 이를 전해 듣고 "지금까지 나를 지켜 주던 음병(陰兵)이 내 복이 다한 것을 보고 떠나간 것"이라며, 자신이 얼마 못 가서 죽을 것임을 예상했다는 것이다.
문무왕은 김유신의 죽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비단 1천 필과 조 2천 석을 부조로 보내고 군악의 고취수(鼓吹手) 100명을 장례식에 보내주었다. 김유신의 유해는 금산원(金山原)에 묻혔고, 왕명으로 그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 무덤 앞에 세워졌으며, 수묘인을 두어 무덤을 지키게 했다.
흥덕왕(興德王, 《삼국유사》는 경명왕) 10년(835년), '흥무왕(興武王)'으로 추존되어 사후 왕으로 지위가 격상되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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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및 업적
※표시된 날짜는 서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음력입니다.
※신라의 고유 연호를 쓰던 시기는 모두 연호로, 그렇지 않은 경우는 왕의 재위년도로 표기하였습니다.
※다음은 약칭입니다.
-본기:《삼국사기》 신라본기,
-열전:《삼국사기》김유신열전,
-유사:《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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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요약
관점


김유신의 인물상은 대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나온 것이 전부다. 유년 시절의 일화로 유명한 것은 《파한집》(破閑集)에 수록된 것으로, 소년 시절의 김유신이 천관(天官)이라는 기생에게 반해 자주 그녀의 집에 드나들었는데, 어머니의 꾸중을 듣고 다시는 그녀의 집으로 출입하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어느 날 술에 취하여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말 위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말은 주인이 늘 가던 대로 그녀의 집 앞으로 가서 멈추었다. 천관이 나와서 보고 반가워하고 또한 원망스러워 눈물을 흘리는데, 유신은 말에서 내려 그 자리에서 말의 목을 베고 안장까지 내버린 채 돌아왔다. 사후 그녀가 살던 집터에는 천관사(天官寺)라는 절이 세워졌다.[주 5]
김유신 개인이 지니고 있었던 가치관으로는, 비담의 난을 진압하면서 별이 왕궁인 월성에 떨어진 것에 기세가 오른 반군을 상대로 놀라 어쩔줄 모르는 여왕과 신료들을 향해 "길함과 불길함이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 부르는 것이고, 요사함은 사람의 지혜와 덕망으로 물리칠 수 있다"[8] 이라며 일축하는 개명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원병 요청을 받고 백강까지 도착한 당군 장수 소정방이 갑자기 하늘에 나타나 장군의 진영 위를 빙빙 맴도는 새를 보고, '원수(元首)가 해를 입을 징조'라 하여 겁먹고 상륙하지 않으려는 것을 "겨우 저런 것 때문에 일을 그르쳐서야 되겠습니까."라며 칼을 새에게 겨누자 새는 몸이 찢겨져 땅에 떨어져버리고, 소정방은 그제서야 의구심을 풀고 군사를 백강에 상륙시켜 전투에 나섰다는 기록도 있다.[9] 다만 이 기록은 소정방이 백강에서 상륙하기 직전 김유신은 백강이 아니라 황산벌에 있었다는 시간적 모순이 생겨, 후대 사람들이 김유신을 부각시키고 일부러 소정방의 용렬함을 강조하기 위해 창작했거나 비슷한 사건이 전투 초기에 있었던 일인 것처럼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흔히 사대주의의 표상으로 인식되어 온 김유신이지만, 황산벌 전투로 약속 기일에서 하루 늦은 것을 트집잡아 신라군 독군 김문영을 처형하려 하자 "황산벌에서 우리가 어떻게 싸웠는지 보지도 못하고, 그저 기일이 늦은 것을 트집잡아 우리에게 죄를 주려 한다. 아무 죄도 없이 나는 이따위 모욕을 받을 수 없으니, 나는 당병과 먼저 싸우고 난 다음에 백제를 깨뜨리겠다!"[10] 며 강경한 태도를 보여 끝내 소정방이 한 발 물러서게 했고, 당병이 아직은 동맹이지만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나면 다음은 신라가 그들의 목표가 될 것을 예측하고 그들과 싸울 계책을 왕에게 추천하기도 했다. 무열왕이 "우리를 위해 우리의 적을 멸해준 그들을 친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느냐?"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유신은 "개도 꼬리를 밟으면 자기 주인이라도 가리지 않고 그 다리를 물어버리는 법. 어려움을 당하여 어찌 자신을 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11][주 6] 라 말하여, 지금 동맹이나 혈맹관계에 있다 해서 그저 무조건 의지하고 따라다니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철저한 현실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할아버지 때부터 쌓아온 집안의 가풍을 중시해, 당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살아 돌아온 원술에 대해 "왕명을 어기고 가훈을 더럽힌 죄를 물어 목을 베소서"[5] 라 왕에게 청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여, 끝내 아들이 집안으로부터 버림받아 평생 숨어살도록 몰아갔다. 실제로 가문의 안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모습은 훗날 죽은지 100년이나 지나 무열왕계 독재의 강화와 함께 그의 자손이 신라 정계로부터 냉대받으며 소홀한 대접을 받게 되자 그의 무덤에서 회오리바람이 일고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는[12] 설화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개개인의 골품이나 신분, 관례보다는 능력과 공적을 중시해, 662년 평양을 포위한 소정방의 당병에게 군량을 수송하는 데에 공을 세운 휘하의 열기 · 구근에게 사찬이라는 벼슬을 내려줄 것을 청하며, 너무 과하지 않느냐는 왕의 지적에 "벼슬은 공적을 담는 그릇으로 공에 보답하여 주는 것인데 무엇이 지나치겠습니까."[13]라는 말로 기어이 두 사람의 관등 수여를 관철시킨다. 당시 열기는 신라군 내의 보기감(步騎監)을 맡고 있었는데, 보기감은 신라에서 군사감(軍師監)과 함께 사지에서 나마(奈麻)까지의 관등을 가진 자들이 맡던 관직으로(《삼국사기》직관지), 급찬이나 사찬으로 오른다는 것은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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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요약
관점
전근대
인신(人臣)으로써의 평가
이미 신라 전 시대는 물론이고 그가 생존해 있었던 당대에도, 김유신은 나라를 크게 일으킨 충신이자 주석지신으로 숭앙받았다.[주 7]
648년 김춘추가 입당하였을 때 당 태종이 김유신의 사람됨에 대해서 김춘추에게 물었다는[15] 《삼국사기》 김유신열전 외에도 《일본서기》에 고구려 멸망 뒤인 668년 신라 사신 김동암이 일본에 갔다가 귀국할 때 후지와라노 가마타리가 김유신에게 따로 수어조선 한 척을 선물로 보낸 점도 이미 당대 동아시아 세계에 김유신의 명성이 자자하였음을 짐작케 하며, 열전 하권 말미에 찬자의 논찬으로서 당시(고려)의 사대부들이 김유신을 여전히 칭송하고 꼴 베고 나무하는 어린아이들까지 그를 알고 있을 정도였고 나아가 그 사람됨이 다른 사람과는 무언가 차이가 있었을 것이라고 한 것이 결코 과장된 표현만은 아닐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16]
김유신 사후에도 "유신 각간이 세상에 나서 대업을 이루어 나라의 보배가 되었기에"(《중화 3년명 금동사리기기》), "오산(鼇山)의 정기를 받고 접수(鰈水)의 정기를 타고났다. 문부(文符)를 쥐고 재상의 집안에 태어나 무략(武略)으로 왕실을 높이 떠받들었으며… 마침내 두 적(敵)를 완전히 평정하여 토군(兎郡)의 사람들을 길이 편안하게 하였고, 세 임금(진덕왕, 무열왕, 문무왕)을 잘 받들어 진한(辰韓)의 풍속을 크게 위로하였다."(《진경대사탑비》) 등 신라 하대에 이르기까지 김유신은 신라 국가와 왕실을 위하여 힘쓴 업적과 능력을 높이 평가받았다.
김유신은 양신(良臣)이자 성신(聖臣)으로써 태종 무열왕을 도와 삼한을 통일하였으며, 사후 동해의 용이 되었다는 전승이 퍼진 문무왕과 함께 불교의 삼십삼천(三十三天)의 화신으로 신라를 진호(鎭護)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신라에서 무열왕에게 당 태종과 같은 '태종'의 묘호(廟號)를 붙인 것을 당에서 항의하며 지우도록 요구했을 때, 신라 조정은 당 태종이 위징(魏徵)이라는 현신(賢臣)을 얻어 대업을 이룬 것과 마찬가지로 무열왕이 김유신이라는 '성신'(聖臣)을 얻어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루었으며 이 둘은 동격이라는 논리로 거절하고 있다.[9][17]
이러한 김유신에 대한 신라 왕실과 조정의 고평가는 그에 대한 흥무대왕(興武大王) 추봉으로 그 정점을 찍었다. 흥무 즉 '무(武)를 일으킨(興) 자'로써 김유신이 무장으로써 보였던 능력을 높이 평가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한국사를 통틀어 인신(人臣)이 왕으로 추봉된 것은 김유신이 유일하였다.
고려의 현종(顯宗)은 최치원(崔致遠) · 설총(薛聰)과 더불어 그를 개국공(開國公)에 봉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열전의 총 분량(10권) 가운데 3권을 모두 김유신에게 할애하고 있을 정도로 김유신을 추켜 세웠으며, 이승휴는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김유신은 공신(功臣)으로, 신묘한 병서를 얻어 무예에 정통하였도다."(庾信金公是功臣, 得妙兵書精虎藝)[18]라고 읊었다. 조선조에는 무묘(武廟)를 세워 배향해야 할 인물의 한 명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 문무왕과 그 신료들
-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돌아오던 길에 남천주에 들러 문무왕은 그의 조부 때부터 신라 조정에 봉사해 온 일을 들며, "지금 유신이 할아버지, 아버지의 일을 계승하여 사직(社稷)을 지키는 신하가 되어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어 그 공적이 많았으니, 공의 일가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흥망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5] 며 김유신의 공적을 추켜세우면서 관직과 은상을 올려주는 것이 어떠냐고 묻자 신하들은 모두 동의하고 있다.
- 구근(仇近)
- 구근은 열기와 함께 김유신의 명으로 소정방에게 군량을 수송하는 역할을 맡았고 그 공으로 김유신의 추천을 받아 사찬에 임명되었다. 김유신의 셋째 아들인 파진찬 원정(元貞)을 따라 서원경(西原京)의 술성(述城)을 쌓는데, 원정이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 구근이 일을 게을리 한다며 곤장을 치자, 구근은 “나는 일찍이 열기와 더불어 죽음을 헤아릴 수 없는 곳에 들어가 대각간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고 대각간께서는 나를 무능하다 하지 않으시고 국사(國士)로 대접하셨는데, 지금 뜬소문을 듣고 나에게 죄를 주니 평생 치욕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소.”라며 억울해했고, 원정은 이 말에 평생 부끄러워하고 후회하였다.[19]
- 성덕왕
- 김유신의 적손(嫡孫) 김윤중(金允中)은 당에도 이름이 알려져, 당이 등주를 기습한 발해에 대한 공격을 신라에 요구하면서 그를 지목하여 신라군의 사령관으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김윤중은 성덕왕 때에 대아찬(大阿湌)이 되어 성덕왕으로부터 각별한 대우를 받았는데, 한가위 때에 성덕왕이 연회를 열면서 김윤중을 부르게 하자 옆에서 "지금 종실(宗室)과 척리(戚里, 외척) 가운데 좋은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뭐하러 굳이 소원한 신하를 부르려 하십니까?"라고 간언하자 성덕왕은 "지금 과인이 경들과 함께 평안하고 무사한 것은 윤중의 할아버지 덕분인데, 공의 말대로 했다가 그 사실을 잊어 버린다면 선한 자를 잘 대우하여 그 자손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도리가 아니다"라며 김윤중을 불러 가까운 자리에 앉히고 그의 할아버지의 생애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으며, 날이 저물어 물러갈 때에는 김윤중에게 절영도산 명마 한 필을 하사하였다.[5] 이 일화는 김유신 덕에 신라가 번영을 누리고 있음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지만, 《삼국사기》에서 이러한 일화가 제시된 것이나 "여러 차례 왕의 은혜로운 보살핌을 받자, 왕의 친속(親屬)들이 자못 그를 질투하였다."[5]라는 언급이나, "여러 신하는 (김윤중이 성덕왕으로부터 후대받는 것을) 불만스럽게 바라볼 뿐이었다"[5]라는 표현한 것은 실제로 김유신의 후손이 정치적으로 소외되고 있었음을 반영한다.[20][주 8]
- 윤관
- 동북 9성을 개척한 윤관은 평소 김유신을 존경했으며, 여진 정벌을 앞두고 사람들에게 "김유신이 전쟁할 때 6월이라 여름이었는데도 강물이 얼어붙어 군사들이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지성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니, 나라고 그렇게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라며 전의를 불태웠다고 한다.[22] 다만 이것이 언제 어느 때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 김부식
- 《삼국사기》 열전 말미에서 김부식은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용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으면 영영 잊혀질 뻔 했는데 김유신 같은 이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칭송하여 사대부는 물론 꼴 베고 나무하는 아이까지도 능히 알고 있다며, 그 사람됨이 반드시 다른 사람과 차이가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유신의 재능뿐 아니라 신라 조정에서 그를 중용하여 믿고 일을 맡겨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공업을 이룰 수 있었다”며 신라 조정의 역할을 은근히 강조하여, 신라 조정이 김유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고려 조정과 인종도 김부식 자신을 전적으로 믿고 기용해 주기를 바라는 기대를 내심 비치고 있다.
- 최보
-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인용된 사론에서는 유신을 두고 "충분(忠憤)한 마음과 영위(英偉)한 지략을 기울여 통일의 공을 이루고 위(位)는 장상(將相)을 겸하여, 몸소 국가의 안위를 도맡아 20여 년 동안 우뚝 국가의 장성(長城)"이 된, "뛰어난 재주로 그 훌륭한 임금과 적당한 때를 얻어 그 큰 공을 이룬 자"라 평가하며, "어려움을 두루 겪으면서 국사를 위하여 몸을 바쳐 공명과 충절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보전하였으니, 유신 같은 사람이야말로 비길 만한 데가 드물다"고 호평하고[23] "예로부터 영웅호걸의 선비는 비상한 재주가 있어도 꼭 같이 일할 임금을 얻지 못하거나, 어쩌다 같이 일할 임금을 얻어도 같이 일할 때를 얻지 못했다.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같이 일을 도모할 임금을 만나고 같이 일을 도모할 때를 얻어서 세상에 보기 드문 공을 이룩한 자의 예를 김유신에게서 볼 수 있다"며 김유신이 영웅으로 남을 공을 세운 것은 같이 일할 올바른 임금을 만났던 것과 김유신 개인의 재능이 뛰어났던 것에 있다고 평하며, 그가 임종에 문무왕에게 남긴 유언을 신하가 임금에게 할 수 있는 조언들의 요점이라고 호평했다.[24] 한편으로 흥덕왕이 그를 흥무왕으로 추봉한 것에 대해서는 고대 주(周)의 성왕(成王)이 숙부이자 재상이었던 주공(周公)의 제사를 천자의 그것과 준하게 한 일을 들어, 아무리 공이 크다고는 하지만 "신하로서 충성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군신의 명분을 문란하게 만든" 처사라 비판하고 있다.[7]
조선 후기의 문인 강재항(姜再恒)은 최보와 마찬가지로 김유신이 임종에 문무왕에게 한 말은 "(신하로써) 임금에게 고하는 대체를 깊이 얻은 것"이라고 호평하였으며, 제갈공명의 전·후출사표조차도 김유신의 유언에 미치지 못한다고까지 평가하였다.[25]
고려의 김부식처럼 조선의 문인, 관료들 가운데는 김유신의 무신(武臣)으로써의 자질이나 죽는 순간까지 내비친 신라 왕실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뿐 아니라, 그런 김유신을 믿고 맡겼던 국왕의 '명덕'(明德)을 강조하기 위해서도 김유신을 끌어오곤 했다. 중종(中宗) 27년(1532년)에 생원 이종익이 상소를 올려 중종과 영의정 박원종(朴元宗)을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의 관계에 빗대며, 김유신의 무덤에서 회오리바람이 일어 미추왕의 무덤에 가서 탄식하고 다른 나라로 옮겨가겠다고 청했다는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들며 중종반정의 공신인 박원종과 그 후손들을 잘 대우해 줄 것을 청하였다.[26][주 9]
영조 5년(1729) 류엄은 입시해 《동국통감》을 진강하는 자리에서 ”태종왕은 김유신의 현명함을 얻어 능히 ’통삼’(삼국통일)의 기틀을 세울 수 있었고 문무왕이 그 자리를 이어 기어이 삼국통합의 공을 이루었으니 가히 성하다 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김유신이 임종 때에 한 유언을 강조해 “실로 천고에 지극히 경계가 되는 말입니다.”라고 칭찬하면서 국왕이 현명한 신하를 등용하는 것의 중요성을 아뢰었다.[27]
무장으로써의 평가
김유신의 군사적 재능에 대한 호평과 찬양은 이미 고려 시대에도 있었고 조선 초기에도 그러했다. 동북 9성을 개척한 윤관은 김유신을 평소 존경해, “김유신이 전쟁할 때에 6월인데도 강이 얼어서 삼군이 건넌 것은 다름아닌 지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김유신의 ‘지성’을 상찬하였다. 《제왕운기》에서 이승휴는 ”오묘한 병서를 얻어 무예에 뛰어났도다“라고 읊었고, 정추(鄭樞, 1333-1382)는 ”장사는 신기가 있어 칼에다 주문을 외웠고“[28] "김유신 장군은 참으로 영웅이라 천년토록 우뚝하고 기이한 공적이라"[29] 등 김유신을 기리는 시를 남겼다. 여기에는 김유신의 전략이나 전술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보다는 김유신이라는 인물의 신성이나 지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선행된다.
조선 초에 들어와서 서거정은 김유신을 중국의 제갈량에 비유했고, 박세채는 당의 명장 곽분양(곽자의)이나 명(明)의 서중산(서달)에 비유했다. 세조 2년(1456년) 양성지가 본국의 무성(武成)과 무교(武敎)를 대표하는 인물로 사당에 배향되어야 할 인물로 김유신을 을지문덕, 흑치상지와 함께 언급하기도 하였다.[30] 조선 후기의 성호 이익도 김유신을 무교를 대표하는 인물로써 무성왕의 사당에 배향해야 한다고 평가하였다.[31]
특히 조선 후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조선 사회에서는 무장으로써의 김유신의 능력이 더욱 높이 재조명되었는데, “어찌하면 김공을 묘에서 다시 일으켜 취가를 호위하며 오랑캐를 소탕할꼬”(구사맹)[32], “어느 때에나 하늘이 김유신과 강감찬처럼 충의로운 영웅호걸의 신하를 탄생시켜 요망한 기운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큰 수치를 씻을 수 있을지“(성혼)[33] 등 조선의 문인들은 남쪽으로는 일본의 침략과 북쪽으로는 만청의 위협이 가해지는 와중에 김유신 같은 인물이 다시금 나와서 국난을 물리쳐 주기를 바랬던 것이다.
국방력 강화를 논의하면서 김유신이 거느렸던 쇠뇌 부대가 언급되기도 했다.[34] 특히 661년 호로하 전투에서 김유신이 거느렸다는 쇠뇌 부대가 김유신의 승리의 비결 가운데 하나로 주목되어, 영조 원년(1725) 장흥의 김성대가 상소에서 쇠뇌의 효용성을 논하며 ”신라 김유신이 여러 적을 평정한 것은 이것(쇠뇌)에 힘입은 것인데 세대가 오래 지나고 사람들은 다 죽고 없으니 책에도 나오지 않고 기계도 사라져 이를 풀 사람이 없다“고 한탄하였고[35] 정조 때의 정지원도 비슷한 취지로 한탄하는 언급을 남겼다.[36]
근대 이후
근대 이후 김유신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일부 제기되게 된다. 역사학자 신채호는 김유신이 왕가의 외척이 되기 위해 그의 누이들을 이용했다는 점을 들어, 출세의 수단으로 가족을 이용했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군사적 능력에 대하여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은 5만의 신라군을 이끌고 5천 군사의 계백과 맞서 싸웠으나 계백을 쉽게 물리치지 못하고 시간을 지체하였다. 군사의 수가 10배인 김유신의 신라군이 계백의 결사대와의 전투에서 서둘렀음에도 하루 지체하였다는 점에서 사실상 김유신이 계백에게 패배한 전투였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은 답보 상태에 빠진 대치 상황을 돌파하기 위하여 화랑 반굴과 관창의 죽음을 볼모로 군사의 사기를 높이는 전술을 사용하였다. 어린 화랑을 희생한 것은 비인간적인 것이었고 우세한 군세를 이용한 다양한 전술 구사가 부족했다는 비판을 하며 김유신이 뛰어난 지략가라는 미사여구는 과장된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
삼한일통 과정에서의 행적
백제 정벌은 당나라가 주도했고 고구려는 순전히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정권다툼으로 인한 내부의 분열로 자멸한 측면이 있으며 당나라와의 전장에 김유신은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고구려의 군력 자체는 양만춘이 안시성에서 당나라 군대를 상대로 크게 승리를 거둘 정도로 당나라보다 월등했음에도 불구하고 연개소문의 아들들끼리 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자멸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통일 과정에서 김유신의 역할을 지나치게 칭송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서술은 공정한 역사 인물에 대한 평가라기 보다는 추종자들이 미화한 이야기라는 견해도 있다.
더군다나 김유신과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이 고구려의 멸망 자체도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자기네들끼리 싸우다가 자멸한 것인 데다가 고구려가 멸망하자마자 바로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대조영이 발해라는 나라를 건국해서 고구려의 유지를 받들었으며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를 점령한게 아니라 고구려의 영토는 발해가 차지했다는 점으로 보면 김유신은 고구려를 정벌하지 못했다고 봐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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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인물사는 흑백논리에 따른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기관성을 담보받기가 쉽지 않은 대상이며, 이와 같은 이유로 인물 연구를 꺼려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37]
주보돈은 7세기 삼국통합전쟁에서 수행한 역할이나 차지하는 비중은 물론 유관 사료의 양도 여타 인물들에 비해 비교적 많이 남아 전하는 김유신에 대한 연구가 그리 활발하지 못하다는 점에 대해서 단재 신채호 이래 김유신과 그 동업자 김춘추를 대상으로 논단한 인물평이 남북한 역사학계에 크게 영향을 끼쳐 관심을 끌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면서도, 대개의 인물 평전이 그러하듯 자칫 대상을 영웅시하기 일쑤이고 그 결과 실상보다 과장 혹은 미화하여 왜곡되게 다룰 소지가 높은데 현전하는 김유신 관련 사료 속에서 이미 그런 측면이 강하게 엿보이고, 그것이 결국 인물사 자체를 지극히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근본 요인으로 작용하며 김유신에 대한 연구가 부진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지적하였다.[38]
근대
김유신에 대해 처음 관심을 표명한 박은식의 경우 애국계몽적 입장에서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의 내용을 나름의 기준에 입각하여 축약, 정리한 수준에 머물렀다.[39]
이후 보다 구체적으로 입장을 밝힌 연구자는 신채호였다. 그는 김유신에 대해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여동생 문희와 김춘추의 정략적 혼인을 추진한 음험한 정치가로 평가하고, 나아가 김유신전에서는 백전백승의 명장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패전을 모두 숨기고 작은 승리를 과장한 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단정하였다.[40] 주보돈은 신채호의 이러한 평을 두고 "평자의 현실적 인식이나 가치관에 바탕한 선입견이 덧씌워져 실상을 크게 그르칠 우려가 항상 뒤따르는"[41] 것이고 김유신전 전반에 대한 개별 사료를 낱낱이 음미하여 내린 결론이 아니라 외세나 민족을 평가의 기준으로 내세운 단재 자신의 선입견에 근거한 주장이었을 따름이었다고 하면서도, 열전에 내재되어 있는 사료상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약간이나마 드러나 있는 점은 평가하였으며, 전쟁을 치루면서 패전한 사실이 당연히 있었을 법한 데도 이를 전혀 기록에서 배제한 것은 열전이 지닌 사료상의 명백한 한계로써 사료 비판이 철저하게 수반되어야 할 대목이라고 하였다.[42]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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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요약
관점

김유신이 묻힌 금산원의 무덤은 《삼국유사》에는 서산 모지사(毛只寺) 북쪽, 동으로 향해 뻗은 봉우리에 있다고 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모지사 북쪽 봉우리에 있고 부(府)와는 서쪽으로 4리 거리라고 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주부 서쪽 서악리(西岳里)라 기록되었다. 김유신의 것이라 전하는 묘소는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 산 7-10번지에 있는데 이것이 진짜 김유신의 무덤인가에 대한 의문이 현재까지 끊이지 않고 있다(김유신묘 항목 참조). 이 묘는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국가 사적 제21호로 지정되었다.
무덤 면적은 14,143m2이다. 봉분 주위에는 묘를 지키는 호석(護石)으로 12방위로 주석(柱石)을 세우고 거기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했는데, 머리부분은 동물상이고 몸뚱이 부분은 인상(人像)이며 모두 무기를 잡고 서 있는 모습들이다. 무덤 주위에 십이지신을 새기는 것은 신라에서는 왕의 무덤에만 허락된 것이었다. 김상기는 김유신의 묘가 지금과 같은 왕릉으로서의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은 그가 흥무왕으로 추존된 뒤의 일로 추정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김유신의 무덤 앞에는 왕명으로 그의 공적을 기록해 새긴 비석이 세워졌는데, 신라의 국자박사(國子博士)였던 설인선(薛因宣)이 그 비문을 지었다고 전하지만 현재는 비석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임하필기》에는 그의 묘비가 경주 서쪽 10리 지점에 있었으며, 경주부사를 지냈던 홍양호가 그 묘에 제사를 지내고 비를 찾아보았으나 찾아내지 못하다가 20년 뒤에 이서구(李書九)가 금석첩(金石帖) 속에서 임진왜란 이전에 탁본한 것 몇 장을 발견했는데, 필법이 구양순체와 많이 닮은 것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현존하는 무덤 앞의 비석은 후대에 그의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하나에는 '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 다른 하나에는 '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라 새겨져 있는데, 비석을 새길 당시 그가 흥덕왕으로부터 흥무왕으로 봉해졌음을 미처 알지 못하고 「묘(墓)」라 적었다가 나중에야 그 글자 위를 덮고 다시 「능(陵)」자로 고쳐 새겼다. 하지만 비석의 원래 재질과 글자를 메워넣은 재료의 재질이 서로 달라서 지금도 비가 오는 날에는 「능」이라는 글자 뒤에 가려진 「묘」자의 흔적이 드러난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진천군에는 이미 신라 때부터 김유신사(金庾信祠)라는 사당이 있었는데 조선 시대까지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된 것을 철종 2년(1851년) 백곡면에 '죽계사'를 세우고 김유신의 영정을 모셨으며,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26년 김유신의 후손 김만희의 노력으로 지금의 자리에 길상사(吉祥祠)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이곳은 1975년에 정비되었으며, 뒷산인 길상산은 다른 이름을 태령산(胎靈山)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탯줄을 이 산의 봉우리에 묻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경주에는 명종 18년(1561년)에 당시의 부윤 이정(李楨)이 김유신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역 유생들과 함께 선도산 아래에 서악정사(西岳靜舍)를 세웠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2년과 1610년에 걸쳐 사당과 강당, 동·서재를 새로 지었고, 인조 원년(1623년)에 국가가 인정한 사액서원으로서 '서악'이라는 이름을 받고 지금의 서악서원(西岳書院)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때 김유신에 더해 최치원과 설총을 더 배향하게 되었으며, 서원철폐령 때에도 폐쇄되지 않고 살아 남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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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김유신과 관련되어 전해지는 신이담(神異談)은 김유신이라는 개인이 생전에 전장에서 보인 전략 · 전술적인 안목과 이를 통해 쌓아올린 승리담에 대한 경외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다분히 인간의 사고와 역량을 넘어서는 초인적인 것으로 다가왔고, 사람들로 하여금 김유신이라는 존재를 보통 인간의 기준치를 아득히 뛰어넘는 능력을 지닌 인간계 저너머(beyond) 초월적인 세계 어딘가의 존재 혹은 그러한 세계와 깊게 연결된 존재로 인식되게 했으며, 자연스럽게 김유신이라는 인간에 대한 영험한 신이담의 유포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집사랑 김장청의 《김유신행록》이 베이스가 된 《삼국사기》 열전 단계에서 김유신의 탄생과 사망에 이르는 일대기를 태몽, 비정상적 회임 기간, 사망 예언 등으로 비범함이 강조되나 그 존재 성격은 현실 세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열전으로, 다시 《삼국유사》로 갈수록 비현실성이 강화되며[43] 《삼국유사》에서는 환생, 천상에서 하강, 다시 천상으로 복귀 등으로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초월적 존재로 나타난다.[44] 김유신에 관한 신이담들은 김유신이 불교적 천상세계의 현신이자, (난승이나 밀본과 같은) 도술 능력자 내지는 신비한 세계와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의미하고, 김유신 또한 그러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인식을 표현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45] 이는 김유신이 신기한 도술을 부릴 수 있는(혹은 그런 쪽과 연관이 깊은) 인물이라는 인식이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보여준다.[46]
《동경잡기》에 경주의 기우처 가운데 '김각간묘' 즉 김유신의 묘가 포함되어 있고,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 부인이 무속에서 '만명신'으로 모셔졌다는(《오주연문장전산고》) 전승들은 김유신의 도술적 능력이 그 어머니로부터 이어지는 혈통과 관련되어 있다는 인식이 무속에 전해져서인 것으로 보인다.[47] 박찬흥은 김유신열전에서 김부식이 운운한 "사대부는 물론이고 꼴 베고 나무하는 어린아이도 김유신의 이름을 안다"는 말은 상투적인 표현으로 약간의 과장도 섞여 있는 듯하지만, 이는 민간에서도 김유신이 (역사적 업적을 남긴 영웅으로써보다도) 신비로운 도술적 능력을 가진 존재로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을 이렇게 표현했을 가능성도 있다고[48]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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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 구형왕 仇衡王 | |||||||||||||||||||||||||||||||||||||||||||||||||||||||||||||||||||||||||||||||||
| 김세종 金世宗 | 김무력 金武力 | 김무득 金武得 | |||||||||||||||||||||||||||||||||||||||||||||||||||||||||||||||||||||||||||||||
| 김서현 金舒玄 | |||||||||||||||||||||||||||||||||||||||||||||||||||||||||||||||||||||||||||||||||
| 김유신 金庾信 | 김흠순 金欽純 | 김보희 金寶姬 | 문명왕후 文明王后 | ||||||||||||||||||||||||||||||||||||||||||||||||||||||||||||||||||||||||||||||
| 김삼광 金三光 | 김원술 金元述 | 김원정 金元貞 | 김장이 金長耳 | 김군승 金軍勝 | 김반굴 金盤屈 | ||||||||||||||||||||||||||||||||||||||||||||||||||||||||||||||||||||||||||||
| 김윤중 金允中 | 김윤문 金允文 | 김영윤 金令胤 | |||||||||||||||||||||||||||||||||||||||||||||||||||||||||||||||||||||||||||||||
| 김장청 金長淸 | 김암 金巖 | ||||||||||||||||||||||||||||||||||||||||||||||||||||||||||||||||||||||||||||||||
선대
부인과 후손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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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문화속에 나타나는 김유신
고전 소설
- 흥무왕연의(興武王演義) - 조선 고종 14년(1877년) 이정균(李鼎均)이 지은 고전소설이다.
드라마
영화
소설
- 윤승한 《(만고명장) 김유신》(1941년, 야담사)
- 김정산 《삼한지》
- 차무진 《김유신의 머리일까》
- 정수인 《고구려》(전6권)
- 장태우 《문무》(전3권)
- 제성욱 《여황선덕》(전2권)
- 황운성 《계백의 칼》(전2권)
- 정진영 《선덕여왕》
- 《천년전쟁》(전2권)
신문연재소설
- 이문열 《대왕, 떠나시다》(2012) - 월간중앙 5월호~10월호 연재(미완)
역사 평전
- 《김유신 말의 목을 베다》 글 황윤 그림 손광산
만화·웹툰
- 윤인완 글 · 양경일 그림 《데자뷰》(2004년) - 봄·여름·가을·겨울로 이루어진 네 편의 수록작 가운데 윤인완과 양경일이 스토리와 작화를 맡은 봄편의 주인공 원술의 아버지로,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아들을 "나는 전장에서 자기만 살자고 도망치는 아들은 둔 적이 없다"라며 꾸짖고 내쫓는 음영이 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밖에 원술의 회상으로 "너는 사내 대장부가 그렇게 용기가 없어서야 어떻게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가려고 그러느냐"라고 꾸짖기도 했던 것이 암시된다.
- 박윤후 글 · 조미현 그림 《천관녀》(2008년, 전5권)
- 류량 글·그림 《사라사》(2008, 전8권)
웹툰
네이버 웹툰
- 《사신소년》 - 카펫의 코어로 등장한다. 수식어는 '신라 명장'.
- 《도깨비의 밤》
게임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Wikiwand -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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